할머니 집은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다른 지방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제주도에서는 자식을 결혼시키면 딴살림을 차려준다.
형편상 한 울타리에서 살게 된다면 며느리를 위해서 부엌을 하나 따로 만들어준다.
어지간해서는 며느리가 해 주는 밥을 먹지 않는다.
며느리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 동네 할머니들에게 놀림을 당한다.
자기 힘으로 밥도 못 해 먹는 늙은이라는 취급을 받는다.
몸져누울 때까지 자기 밥은 자기가 차려서 먹는다는 것이 제주도 어른들의 고집이었다.
그런 고집 때문에 자식을 결혼시키면 집을 따로 장만해 주었다.
내 할머니와 아버지도 그런 관습을 따랐다.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집은 달랐다.
할머니집과 우리 집 사이는 300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내가 할머니집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집이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까지 할머니 혼자 사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일본으로 가셨다.
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집으로 오셨다.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일본에 계시다고만 들었다.
할아버지가 오신 후부터 그 집은 할머니집에서 할아버지집으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나와 남동생에게 번갈아 가면서 하루씩 할아버지집에 가서 잠을 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집에 가는 날이면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내 손에 10원짜리 동전을 몇 개 쥐어주셨다.
아버지도 모르고 어머니도 모르는 용돈이 생겼다.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라면도 끓여주셨다.
그 당시에는 라면이 너무 귀한 음식이었다.
라면 한 봉지가 100원 정도 했을 텐데, 100원도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할아버지는 담요를 펼치고 그 위에 화투장을 던지면서 노셨다.
아마 미나토라는 놀이였던 것 같다.
화투놀이를 엄격하게 금하셨던 어머니 때문에 나는 화투를 모른다.
그래도 미나토라는 말이 익숙한 이유는 할아버지집에서 늘 보았기 때문이다.
1년 후 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나를 귀여워해 주셨던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충격에 나는 크게 슬퍼했다.
오열을 하고 있는 나를 큰누나가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큰누나는 나에게 왜 그렇게 우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할아버지가 떠나가면 다 그렇게 울어야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누나는 나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그때는 누나가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10살쯤 되었을 때 식구들을 버리고 일본으로 훌훌 떠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성을 만나 살림을 차리고 자식을 낳고 사셨다.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었는지 돌아가시기 1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오신 거였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던 누나들은 할아버지가 무척 얄미웠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할아버지가 마냥 좋았다.
누가 뭐래도 내 할아버지이셨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일본에서 작은아버지가 오셨다.
할머니는 작은아버지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아버지도 작은아버지를 살갑게 대하셨다.
나는 작은아버지가 내 할머니의 아들인 줄 알았다.
아버지와 너무 사이좋게 지내셨기에 아버지의 친동생인 줄만 알았다.
얼굴도 비슷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는 우리말을 전혀 못 하셨다.
일본어로만 대화를 하셨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말을 한 토막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여 들었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반응을 하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무척 사이좋은 형제인 줄만 알았다.
얼마 후에 작은아버지는 일본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후로 작은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찾아간 적도 없다.
가끔 궁금한 생각이 든다.
작은아버지는 일본인으로 살고 있을까? 한국인으로 살고 있을까? 이민진 작가의 소설 <빠친코>를 읽으며 문득 작은아버지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