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졸렬한 마음이 있다

by 박은석


어떤 사람이 괜히 미워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밉고 목소리를 들으면 밉고 숨소리조차도 미워질 수가 있다.

나는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그 사람은 요리조리 잔머리를 돌리면서도 잘 사는 것 같을 때가 그렇다.

나는 그 사람에게 선한 마음으로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가시도친 말을 할 때가 그렇다.

세상이 나를 몰라주는 것 같고 그 사람만 알아주는 것 같음 마음이 들 때가 그렇다.

그럴 때는 슬그머니 독화술을 쓴다.

‘망해라 망해라.’

그런데 아무리 독화술을 쓰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방패막이가 있는 것 같다.

나의 독화술이 그 사람에게 닿지 않는다.

세종대왕의 며느리인 휘빈 김씨가 그랬다.

남편 문종이 다른 궁녀에게 마음을 두는 것 같자 온갖 독화술을 사용했다.

부적을 붙이기도 하고 궁녀의 신발과 뱀을 태워 그 재를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성공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만 망했다.




다른 사람이 미워질 때는 분명히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까닭 없이 밉지는 않을 것이다.

일하는 스타일이나 말투나 행동이 나와 안 맞아서 미워지기도 한다.

그 사람이 과거에 나에게 아픔을 준 어떤 사람과 비슷한 이미지일 때도 미워진다.

그리고 상대방이 정말 인격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이어서 나에게 상처를 줄 때 그 사람이 미워진다.

이 외에도 인간관계 속에서 미운 감정이 들 때는 많이 있다.

그런데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미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싫어하는 야구팀의 선수라면 그가 홈런을 치든 명품 수비를 펼치든 밉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의 대표라면 그의 얼굴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순간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싶다.

그가 하는 말은 다 가식적으로 들리고 그가 고무장화를 신고 수해복구 현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삽질을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쇼로밖에 안 보인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대단한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나와 생각하는 방향이 안 맞고 삶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펼치며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내 친구 중에는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간다.

그의 삶을 보면 너무나 자유분방하다.

하고 싶은 일 실컷 하며 산다.

솔직히 부러운 면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렇게 살아보라고 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내가 그 친구처럼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내가 그 친구처럼 산다면 지금까지 지켜왔던 나의 신앙과 가치관이 무너지게 될 게 뻔하다.

내 인생에서 신앙과 가치관이 빠져버린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공백이다.

마치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처럼 큰일이다.

나는 그 친구처럼 살 수가 없다.

그렇게 살아보라고 판을 깔아도 그렇게 살 수가 없다.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코지를 할 수가 없다.

그럴 때 나는 야비한 인간이 된다.

나는 굉장히 수준 높은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고 그 친구는 세속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세상이 나의 이 고결한 마음을 이해해 줄 것이고 그 친구처럼 세속적인 인간은 망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세뇌시킨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프랑스어로 르상티망(resentment)이라고 한다.

보복하고 싶은 심리 상태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 르상티망이 약자들의 무기라고 했다.

르상티망을 ‘도덕’이라는 말로 포장을 해서 강자들을 비도덕적인 존재로 몰아붙이고 죄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내려놓게 했다는 것이다.

아주 졸렬한 태도인데 그런 모습이 나에게서도 보인다.

나는 나대로,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인정해주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내 속에 졸렬함이 있어서 그렇다.

내 속에 졸렬한 마음이 있다001.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