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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Oct 25. 2023

이 가을에 설악산 종주를 꿈꾸며


한동안 10월 중순이 되면 설악산에 갔었다.

내 형편상 남들이 많이 가는 주말에는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월요일이 쉬는 날이니까 10월 중순이 되는 월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해인가는 그 월요일 새벽부터 비가 내린 적이 있었다.

꽁꽁 싸맸던 배낭만 쳐다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랜 적도 있다.

나의 가을 설악산 산행은 간단하다.

아침 8시 이전에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속초로 가는 버스를 탄다.

그 시간대에 출발하는 버스는 한계령 고갯길로 올라가서 옛 휴게소에 들른다.

그 시간대가 지나면 한계령 터널을 통과해서 속초로 직행한다.

한계령 옛 휴게소에 도착하면 9시 30분 정도 된다.

잠깐 몸을 풀고 사진 몇 장 찍는다.

10월 중순이면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기 때문에 한계령 휴게소에서도 단풍 구경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래도 설악산 종주를 위해서 잠깐 몸을 풀고 오전 10시 정도에 본격적으로 산행을 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새벽 3시 정도에 벌써 산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내 형편은 그들처럼 할 수 없다.

그래서 오전 10시부터 미친 듯이 산을 탄다.

잠깐 쉬는 시간에 단풍 구경을 하기는 하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게 더 급하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

한계령 휴게소를 출발해서 3시간 정도 지나면 설악산 대청봉에 다다른다.

10월 중순이니까 가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설악산의 10월 중순은 겨울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는 대청봉에서 첫눈을 맞은 적도 있다.

대청봉에서 사진 몇 컷 찍고 내려와서는 중청대피소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한다.

산에서 먹는 최고의 식사는 뭐니 뭐니 해도 라면이다.

코펠에 삼겹살도 몇 점 구우면 금상첨화다.

이렇게 배를 채우면 그다음에는 미친 듯이 내려가야 한다.

날이 어둡기 전에 설악동에 도착해야 한다.

공룡능선 같은 곳은 엄두를 낼 수가 없다.

나에게는 그런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면서 내려온다.

천불동 계곡을 지날 때는 정신이 아찔해진다.

혹시 내가 걸어갈 때 이 철제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다리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린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까 봐서 최대한 태연한 척한다.

먼 곳을 바라보면서 가을의 정취를 누리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고소공포증으로 잔뜩 쪼들아진 상태이다.

이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리를 죽여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지금 제가 죽는 거 아니죠? 저 살려주시는 거죠?”

어쨌거나 고소공포증과 싸우면서 천불동 계곡을 내려온다.

어느덧 짧은 가을의 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고 어둑어둑해질 때쯤이면 설악동 신흥사 불상 앞에 다다른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설악동에는 산나물을 밥집들이 많다.

어느 집이 맛있는지는 알아볼 필요도 없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비빔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랜다.




포만감에 취한 채 시내버스를 탄다.

속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근 한 시간 걸린다.

어두워진 설악산의 그늘에 갇힌 채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면 터미널에 도착한다.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차편과 성남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차편을 찬찬히 살펴본다.

운이 좋으면 성남시외버스터미널행 버스의 좌석이 남아 있다.

그놈을 타고 야탑역 성남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밤 11시가 조금 넘는다.

12시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

만약 그놈이 없다면 동서울터미널행 버스를 탄다.

그러면 새벽 1시쯤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어쨌든 집에 들어오면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든다.

나 스스로 ‘설악산 당일치기 미친 종주’라고 이름 붙였다.

올해는 10월 9일에 설악산에 가려고 했는데 코로나 후유증으로 가지 못했다.

아쉽게도 기회를 놓쳐버렸다.

하지만 아직 가을이 다 지나간 것이 아니다.

어쩌면 도전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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