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문 저녁에 아내와 산책을 했다.
이웃 동네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있는 공원에서였다.
가는 길 땅바닥은 은행잎으로 한 이불 덮고 있었다.
하늘도 노랬고 땅도 노랬다.
온통 노란 세상이다.
지금 요맘때의 풍경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땅을 굽어보면서 노란색 은행잎 몇 닢을 건진다.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벌레 먹지 않은 깨끗한 은행잎을 주워서 책갈피로 꽂아 두었었다.
가끔은 은행잎을 편지지로 삼아 몇 글자 적어 친구에게 건네기도 했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누구에게 보냈는지, 무슨 말을 썼는지.
즐거운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나도 한때 샛노란 은행잎처럼 샛노란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다.
세상을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처럼 샛노란 세상을 꿈꿨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다 지난 꿈이다.
그런 꿈을 꿨었다는 것조차 잊고 산다.
그런데 은행잎은 1년 52주 중에서 적어도 한 주간 정도는 세상을 노랗게 물들인다.
나는 초여름의 초록 세상을 좋아한다.
어느 여름에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에게 초록 세상이 되니까 너무 좋지 않냐고 물었다.
아내는 초록색도 좋지만 알록달록한 색깔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왜 하나님께서 풀과 나무의 색을 온통 초록으로 만드셨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초록이어도 다 같은 초록이 아니지 않냐고 했다.
어떤 것은 조금 덜 연한 초록이고 어떤 것은 조금 더한 초록이고 어떤 것은 짙은 초록이니 초록도 다양한 것 아니냐고 했다.
아내는 다양한 초록도 좋지만 기왕이면 빨주노초파남보 모든 색이 들어가면 더 좋지 않냐고 했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빨간색, 저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보라색처럼 온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칠하면 얼마나 예뻤겠냐고 했다.
나는 그러면 그건 동화나라 같지 않냐고 했다.
아내는 동화나라 같은 세상이니까 얼마나 좋겠냐고 했다.
지금이 딱 아내가 바라던 색깔의 세상이 된 것 같다.
마법을 부리듯이 은행잎이 세상을 샛노랗게 만들었다.
그 은행나무들 사이에 서면 나도 노랗게 변하는 것 같다.
그 은행나무 아래에 서면 비밀의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저쪽 어딘가에 비밀의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면 동화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은행나무 아래서 저마다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비밀의 문에 서 있다는 인증샷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진이 잘 나온다.
얼굴도 환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심이 깊은 얼굴들이었는데 샛노란 은행잎 아래에 있으니 주름살들이 펴지나 보다.
샛노란 은행잎을 밟고 있으니 동화나라의 왕자님도 되고 공주님도 된 것 같은가 보다.
아내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온 세상이 알록달록한 색깔로 칠해진다면 좋을 것 같다.
동화나라처럼 온 세상이 예쁜 색깔로 칠해지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동화나라에서는 악당들은 물러나고 모두가 착하게 사니까 얼마나 좋은 세상이겠는가?
시인 김용택 선생의 <그 여자네 집>을 들여다보면 노란색이 가져다주는 마법에 걸린다.
어떤 이에게는 수십 년 전 어린 시절로 들어가고 어떤 이에게는 옛날 옛날 한 옛날 할머니의 고향집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모두가 노란색에 취해서 동화나라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샛노란 은행잎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그 선물을 받으려고 해마다 요맘때쯤이면 김용택 선생의 <그 여자네 집>에 꼭 들른다.
그 집 앞에서 기웃거리는 몇 사람 중에 나도 끼어 있다.
몇 번이고 읽고 읽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글이다.
소리 내어 읊으면 더 감칠맛 나는 시이다.
샛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샛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읊으면 더없이 좋은 시다.
잊어버렸던 노란 꿈을 되살리는 시이다.
저버렸던 노란 세상을 다시 꿈꾸게 하는 시이다.
노란 은행잎이 1년 52주 중에서 적어도 한 주간은 책임지고 나에게 선물해 주는 축복이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들어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 오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옹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는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연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