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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Nov 30. 2023

소풍날과 같은 마법 같은 날이 있으면 좋겠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학교 소풍날이면 에버랜드나 롯데월드를 간다.

산과 들로 소풍을 갔었던 내 어릴 때의 상황과는 너무 다르다.

아내는 서울에서 살았으니까 소풍 때 왕릉에 많이 갔었다고 한다.

그때는 왕릉 관리가 소홀했기에 왕릉 위에 올라가서 미끄럼 타면서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딱히 아이들이 갈만한 놀이 시설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부모님들은 일하시느라 바빠서 아이들을 챙길 여유가 없으셨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이문화를 만들어서 놀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이들이 동네 골목을 무대로 삼아서 오징어게임, 사방치기, 술래잡기, 자치기, 팽이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고무줄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동네 안에서 아이들은 안전했다.

하지만 동네를 떠나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아이들의 생활반경은 동네 안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동네를 떠나서 좀 멀리까지 가는 날은 봄가을의 소풍날이 유일했다.




소풍날 아침에 우리는 학교 운동장에 학년별로 모여서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출발을 했다.

내 고향 제주도 봉개국민학교의 소풍 장소는 주로 명도암 오름이었다.

학교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아이들의 발걸음으로는 족히 한 시간이 넘게 걸렸을 것이다.

혼자 가는 길이라면 무서웠을 텐데 반 아이들이 줄을 지어서 가고, 선생님께서 인솔하셨으니 안전하고 즐겁기만 했다.

명도암 마을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침에 4킬로미터를 걸어서 등교했고 오후에 4킬로미터를 걸어서 하교했다.

그 친구들은 자기네 동네로 소풍 가는 게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그 당시의 소풍이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명도암 근처가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절물자연휴양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릴 적에 스쳐 지나던 곳이 이제는 돈을 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소풍날 아침에 어머니는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셨다.

계란도 부쳐주셨고 오뎅도 구워주셨다.

그것도 좋았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도시락은 김밥이었다.

시골 살림에 김밥 김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에 편의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슈퍼마켓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생필품 몇 가지를 떼어 와서 팔았던 점방이 두어 집 있었을 뿐이었다.

김밥을 싸려면 김도 있어야 하고 소시지도 있어야 하고 시금치와 다꽝도 있어야 했다.

그 재료들이 점방에 제대로 갖춰져 있는 날은 횡재한 날이었다.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어머니는 마술을 부리셨는지 김밥을 싸 주셨다.

소풍 가는 길에 마시라고 가방에 칠성사이다도 한 병 넣어주셨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도시락이었다.

도시락 가방을 메고 소풍을 가는 우리는 어서 빨리 소풍 장소에 도착해서 김밥을 먹을 생각에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랐었다.




소풍 전날 잠자리에 들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저녁에 하늘의 구름도 살폈다.

혹시나 소풍날 비가 오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제발 제발 비구름 좀 치워주시고 소풍날에는 해가 방긋하게 뜨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다.

일 년에 딱 두 번 있는 봄소풍, 가을소풍이었다.

반별로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장기자랑도 하고, 수건돌리기도 하고, 보물찾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한바탕 떨어진 곳에 앉아서 학부모님들이 전해준 도시락을 드셨다.

음료는 뭘 드셨는지 얼굴이 시뻘개지셨고 걸음도 비틀거리셨다.

아이들만 즐거운 소풍이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즐거운 소풍이었다.

먼 길 오고 가느라 피곤했을 텐데 힘들었다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는 아파서 결석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는데 소풍날에는 아픈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소풍날의 마술이었나 보다.

지금도 그런 마법 같은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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