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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Dec 09. 2023

잡아먹는 나, 잡아먹히는 나


언젠가 아주 괴상한 그림을 봤다.

칭칭 감긴 뱀 그림이었다.

뱀이 무언가를 덥석 물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자기 꼬리였다.

뱀은 턱은 사람처럼 뼈로 구성된 게 아니라 인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동물도 삼킬 수 있다.

그런 뱀이 뭔가 맛있는 것을 찾아서 냉큼 물었는데 그게 자기 꼬리였다.

그림은 그렇게 보여주고 있었다.

분명히 뱀의 머리는 ‘맛있는 녀석이다. 이것으로 고픈 배를 채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꼬리 쪽에서 통증이 왔다.

꼬리 쪽에 눈이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니까 뭣 때문에 통증이 오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순간에 뱀이 고민을 했을 것이다.

빨리 이 녀석을 잡아먹을 것인지, 아니면 꼬리 쪽의 통증을 먼저 살펴보고 치료할 것인지.

그림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뱀이 입에 문 먹이를 놓치지 않을 것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서 내 궁금증이 머리를 들었다.

뱀이 꼬리의 어느 만큼까지를 삼킬까? 만약 실제 상황이라면 설마 뱀이 자기 꼬리를 물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림은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뱀이 자신의 꼬리를 야금야금 삼킨다면 딱 거기까지일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

꼬리는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하지만 입에서는 맛있다고 너 같은 것은 잡아먹혀도 괜찮다고 하는 상태이다.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의 꼬리가 많이 없어진다.

입에서 식도락의 쾌감을 느낄수록 자신의 꼬리는 잘려 나간다.

잡아먹는 것을 빨리 멈추면 꼬리가 빨리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잡아먹는 것을 늦게 멈추면 꼬리가 회복되는 시간도 늦어진다.

그러나 뱀은 이 이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먹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잡아먹고 말 것이다.




요즘 나를 둘러싼 세상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기분이 꼭 이와 같다.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의 마을인 ‘지구촌’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했다.

예전에는 남이었고 먼 나라였는데 이제는 이웃이 되었고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고 배웠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살 수 있다고 배웠다.

대통령이 마이크 앞에서 ‘세계화’라는 말을 외치는 소리도 들었다.

세계의 일원으로서 세계 모든 나라들과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가자는 구호였다.

그렇게 세계화를 외친 대통령이었으니까 해외여행 제한이라는 빗장도 풀어주었다.

바야흐로 우리는 누구든지 세계의 여러 곳으로 가서 그곳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어린아이들은 우연히 한 번 만난 아이를 다음에 다시 만나면 곧바로 친구로 삼는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만났다면 그건 하늘이 맺어준 굉장한 인연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한 번 만나고 두 번째 만나면 친구가 아니라 나에게서 뭔가를 뺏어가려는 꿍꿍이속을 가진 사람으로 여긴다.

그 어떤 속셈이 있기 때문에 내 앞에 두 번씩이나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살려고 하면 그 사람을 없애야 한다.

그도 나를 그렇게 볼 것이다.

빨리 잡아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잡아먹힌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잡아먹고 있는데 점점 더 내가 잡아먹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 빨리 잡아먹으려고 한다.

내가 잡아먹는 것이 내 꼬리인 걸 깨닫기까지는 계속 잡아먹을 것이다.

어른들의 세상이 이런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잡아먹는 나나 잡아먹히는 나나 둘 다 이제는 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살아갈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회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더 많이 먹으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그 기회를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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