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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an 23. 2024

오늘같이 긴긴 밤에는 오래된 기도를 읊조린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파일을 올려놓으면 컴퓨터를 켤 때마다 한 번씩은 그 파일의 제목을 읽게 된다.
파일을 열어보지 않더라도 그 파일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컴퓨터의 바탕화면에 여러 개의 파일들을 올려놓으면 청소 안 한 방처럼 어지러워 보인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다.

그래서 가급적 바탕화면을 자주 정리한다.

그런데 1년 넘게 내 바탕화면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파일이 있다.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라는 시이다.


오래전 이 시를 처음 대했을 때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굳이 바탕화면에 시를 올려놓지 않아도 인터넷에서 금방 검색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바탕화면에 시를 올려놓았다.

컴퓨터를 켤 때마다 한 번씩은 파일 이름이라도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문재 선생의 기도는 단순하다.

어쩌면 '이런 것도 기도가 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도, 저런 것도 다 기도가 된다.

아주 오래전 옛날부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기도로 삼았다.

그래서 시의 제목을 '오래된 기도'라고 지었나 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였다.

바깥에 나와서 한 시간 가량 돌아다녔더니 손이 굳었다.

추위가 맵다는 느낌을 알 것도 같은 날이었다.

집에 왔더니 세탁기도 얼어 있다.

차가운 공기를 쐬다가 집안의 따뜻한 공기를 만나서 그런지 온 몸이 녹아들었다.

바깥에 나가기 싫은 날이다.

이런 날은 밤도 길다.

오래전 사람들은 동지섣달 긴긴밤을 무엇하면서 지냈을까 싶다.

아마도 그런 날이면 오래된 기도 한 토막씩을 조아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오늘 밤에는 이문재 시인을 따라 <오래된 기도>를 읊조린다.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이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솔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어 마시기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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