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19개월쯤 되었을 때 큰 병을 앓고 시각과 청각 그리고 말을 잃어버렸다.
눈이 안 보이니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귀가 안 들리니 소리를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몸부림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괴성을 지르면서 온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 헬렌의 일과였다.
누군가 곁에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지켜봐주어야만 했다.
헬렌이 6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부모는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서 앤 설리반 선생님을 가정교사로 모셔왔다.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의 손에 인형을 쥐어주고 ‘인형(doll)’의 철자 하나하나를 손바닥에 써 주는 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헬렌의 교육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설리반 선생님과 함께 마당의 펌프가에서 놀던 헬렌이 갑자기 “water(물)”라고 말하였다.
그 소리에 너무나 놀라서 잘못 들었나 했지만 헬렌은 다시 'water'를 말하였다.
어린 아기였을 때 헬렌은 물을 좋아해서 물장난을 많이 했고 가장 많이 했던 말도 바로 'water'였다.
그런데 그때의 발음을 기억하여 'water'를 외친 것이다.
헬렌이 비로소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한 기적과도 같은 날이었다.
그 후 헬렌은 설리반 선생님의 입술 모양을 손으로 만지면서 철자 하나하나를 익혀갔다.
손에 쥐어진 물건의 촉감을 기억하고 자신의 손바닥에 써주는 글씨를 기억하고 손으로 만진 설리반 선생님의 입술 모양을 기억하면서 글을 깨치고 말을 배우게 되었다. 기억이 헬렌 켈러에게 기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기억을 하면서 살아간다.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 형제들과 알콩달콩 지냈던 기억, 학창시절에 좋아했던 선생님 기억, 절대 헤어지지 말자며 변치 않는 우정을 다짐했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번뇌에 싸여 지냈던 청춘의 기억, 첫사랑의 기억, 결혼과 출산 그리고 양육으로 이어진 장년의 기억들.
어쩌면 인생은 기억거리를 만들어가고 기억의 상자를 열어 하나씩 꺼내보면서 지내는 기억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1927년에 발표한 정지용 선생의 <향수>는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읊어지고 불려진다.
시에서 반복되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구절이 우리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더해 가면서 기억하는 일보다 잊어버리는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애써 위안을 삼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서면 내가 잊어버릴까 봐서, 사람들에게 내가 잊힌 존재가 될까 봐서 덜컥 겁이 난다.
잊으면 안 되는데 잊히면 안 되는데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억을 끄집어 올리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