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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Feb 08. 2024

내 앞에 서 있던 곰이 뒤집혀 문이 되었다


어렸을 때 했던 카드놀이가 있다.

동물 이름이 적힌 카드를 나눠 가졌다.

사자도 있었고 호랑이도 있었고 개와 돼지도 있었다.

각자 다양한 동물 이름이 적힌 카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빠져나올 수 없는 방에 갇혀 있었다.

카드를 이용해서 그 방을 빠져나오는 게임이었다.

과연 어떤 동물이 그 방에서 나를 나오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했었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용맹한 동물도 한번 우리에 갇히면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

개나 돼지 같은 가축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손에 들린 카드를 꼼지락꼼지락 만지고 있었는데 그만 실수로 카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떨어진 카드는 위아래가 뒤집혀 있었다.

그 카드에 적힌 동물의 이름은 ‘곰’이었다.

그런데 뒤집힌 카드에는 ‘곰’이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고 ‘문’이라는 글자만 보였다.

무서운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곰이 캄캄한 방을 빠져나오게 하는 문이 되었다.




살면서 곰을 만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곰들은 단 한 마리도 곰돌이 푸가 되지 않았다.

나보다 두 배는 더 키가 큰 녀석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내 앞에 선다.

“곰발바닥 개발바닥” 놀이할 때는 곰발바닥이 귀엽게도 생각되지만 내 앞에 치켜든 곰발바닥은 내 얼굴보다도 더 커 보인다.

그 발바닥으로 한 대 얻어맞으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다.

곰의 발톱은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른다.

곰이 한 번 할퀴면 내 몸의 살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좀 굼뜬 사람을 보면 미련 곰탱이 같다고 하지만 곰이 얼마나 빠른지 아는가?

시속 5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린다고 한다.

사람은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하더라도 시속 20킬로 미터이다.

마라톤 선수나 가능한 일이다.

물에서 곰을 만나면 안전할까?

그렇지 않다.

곰이 나보다 수영을 더 잘한다.

나무에 오르면 안전할까?

곰이 나보다 나무에 더 잘 오른다.




곰을 피해서 달아날 방법이 없다.

달리기로도 안 되고 수영으로도 안 되고 나무에 오르는 것으로도 안 되고 곰과 맞짱 뜨는 것으로도 안 된다.

그러니 곰을 만나면 ‘나 죽었다.’하고 땅에 바짝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

땅에 엎드렸다고 해서 산다는 보장은 없다.

곰이 죽은 동물을 안 먹는다는 말은 이솝 우화에서나 나오는 말이다.

실제 상황은 다르다.

곰은 죽은 동물도 건드리고 간다.

단지 곰을 만났을 때 죽은 척하고 엎드리는 이유는 뛰어봤자 괜한 고생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곰한테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바짝 엎드린 채 비는 수밖에 없다.

제발 내 앞에 서 있는 곰이 배부른 곰이기를 바랄 뿐이다.

자연계의 거의 모든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 더 조사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에 의하면 배부른 상태에서도 계속 먹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한 것 같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카드놀이처럼 곰이 뒤집혀서 정말 문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앞에 서서 내 길을 막으면 곰이지만 그 녀석이 후다닥 사라지면 그곳이 문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냐고?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일어날 수도 있잖은가?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어차피 곰 앞에서 죽을 목숨인데 단 1%라도 살아날 확률이 있다면 그건 좋은 거 아닌가?

살면서 곰을 만날 때가 많았다.

곰 앞에서 살아보려고 바둥거렸다.

살 확률과 죽을 확률을 나눠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언제나 살 확률이 적었다.

남들은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다.

내가 곰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곰 앞에서 항상 쥐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제발 곰이 뒤집혀서 문이 되기를 말이다.

놀랍게도 내 앞에 서 있던 곰이 뒤집혀 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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