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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r 12. 2024

쇼펜하우어의 글보다 그 글의 번역자에게 푹 빠졌다


사람들을 만나면 책 이야기를 많이 한다.

책을 읽으라는 잔소리가 같은 권면도 하고 내가 감동을 받았던 책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1년에 200권 읽기 운동을 펼치다가 3년 전부터 300권 읽기로 바꿨다고 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나랑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 눈치다.

그러면서도 최근에는 어떤 종류의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

딱히 어떤 종류라고 할 것도 없다.

눈에 띄는 책을 읽기 때문이다.

밀리의 서재나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책 목록을 보다가 눈길이 가는 책을 찜한다.

경기도사이버도서관, 성남시전자도서관, 용인시전자도서관, 화성시전자도서관을 클릭해서 인문, 역사, 문학 분야의 책들을 살펴보다가 마음이 동하는 책을 대출한다.

이동 중에는 휴대폰으로 읽고 듣는다.

자리에 앉아서는 태블릿이나 이북리더기로 본다.

때로는 눈으로 읽는 게 편하고 때로는 귀로 듣는 게 편하다.

그럭저럭 하루에 한두 권 읽게 되는 것 같다.




최근에는 철학 관련 서적들에 마음이 많이 끌린다.

나도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이십 대 때나 삼십 대 때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분야이다.

지난주에도 누군가 물었다.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고.

철학 관련 책을 읽는다고 하니까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최근에 읽었던 책 목록들을 기억하면서 대답해 주었다.

스토아철학자들에 대한 책도 읽고 동양 고전도 읽는데 최근에는 <순자>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했다.

현대 철학자로서는 한나 아렌트의 책을 탐독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150년 전 인물인데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책들을 읽었다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무신론자에다가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들었으니까.

그런데 재작년에 쇼펜하우어에 대한 책을 2권  읽었는데 괜찮았다.

작년에도 2권을 읽었는데 괜찮았다.

올해도 한 권을 읽었는데 괜찮았다.




번역 서적인데 괜찮은 느낌을 갖게 된 이유는 책의 내용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번역이 잘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별히 2023년에 철학 관련 서적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책들이 쇼펜하우어의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번역가 김욱 선생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책이 있다.

쇼펜하우어의 명언들을 모은 잠언집 형식이다.

그래서 책 제목에도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딱딱한 철학책인데,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우울한 철학자의 책인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번역가의 탁월한 솜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번역가인 김욱 선생은 당신이 번역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셨다.

아니, 출판되는 것조차도 보지 못했다.

무려 100군데가 넘는 출판사에 투고를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는 사이에 김욱 선생은 별세하셨다.




1930년생.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악전고투하며 사셨다.

신문사 기자 생활 30년을 마치고 은퇴했다.

늘그막에 뭘 할까 생각했다.

남들은 일을 놓고 쉬기 시작할 나이 70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일본문학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10년간 무려 200권의 책을 번역했다.

85세의 나이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취미로 직업을 삼다>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서 그는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였다.

그런 그에게 쇼펜하우어의 글들이 들어왔다.

쇼펜하우어가 남긴 8권의 책과 1만 페이지가 넘는 일기들을 읽으면서 엑기스들만 모았다.

이 책은 꼭 읽혀야 하는 책이라고 자신했지만 출판사들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생전의 김욱 선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분명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글보다 그 글의 번역자인 김욱 선생에게 푹 빠져서 그 책을 읽었다.


<참고1> 故 김욱 번역가의 출판 도전기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forestbooks7&logNo=223346783389&referrerCode=0&searchKeyword=%EB%8B%B9%EC%8B%A0%EC%9D%98%20%EC%9D%B8%EC%83%9D%EC%9D%B4


<참고2>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박신양 이야기

https://youtu.be/y7y6C_HJNVQ?si=R5skcvolPzF_07F8


故 김욱 선생(출처 https://magazine.hankyung.com/money/article/20210120710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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