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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r 20. 2024

수학처럼 어려운 책은 그냥 읽으면 된다 끝까지!


나는 고등학생 때 수학을 무척 좋아했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수학 점수가 좋으니까 이과로 진학하면 좋겠다고 하셨을 정도였다.

영어 점수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수학 문제는 한두 문제만 틀리더라도 굉장히 기분이 상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하루에 볼펜 한 자루를 쓰겠다는 맹랑한 목표를 세우기도 했었는데 수학 문제를 풀면서 그 목표를 실행했었다.

하얀색 모나미 153볼펜으로 연습장(당시에는 누런색 ‘갱지’라고도 했고 ‘16절지’라고도 했다.) 8장을 앞뒤로 빼곡하게 쓰면 볼펜의 잉크가 뚝 떨어졌다.

그게 재미있어서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렇게 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수학은 쓸 일이 없다고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이 재밌었다.

그 해의 대입시험에서는 수학 문제가 너무 어렵게 출제되었다.

수학 시험 시간의 그 당혹스러움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험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수학 점수는 정말 형편없었다.

반타작을 겨우 면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 더 심했다.

신문에서도, 9시 뉴스에서도 수학이 어렵게 출제되었다는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그 소식들을 들으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에게 행복이 될 수도 있고 절망 중에도 나보다 더 큰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을 보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해에 나는 당당하게 대학에 합격했다.

수학 점수가 잘 나와야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수학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도 합격할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이 문제는 꼭 해결되어야 해. 그래야 살아갈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것이 부족하면 다른 것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

모든 것이 완벽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아간다.




대학 입학 후 수학은 나에게 굿바이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방정식, 미분, 적분, 삼각함수라는 단어들은 어릴 적 고향 친구처럼 내 기억 속에 이름만 남았다.

그 문제들을 어떻게 푸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든다.

최근에 ‘수학’이라는 단어가 제목으로 들어간 책을 한 권 읽었다.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보자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면 반갑기도 하지만 어색하기도 하다.

내가 읽은 책도 그랬다.

처음에는 반가웠고 수학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낯선 말들이 튀어나왔다.

분명 내가 친구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당혹감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들면 그 친구와의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진다.

그 수학에 대한 책을 읽을 때의 나의 기분도 그랬다.




책을 읽다 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겪는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있다.

괜히 그 책을 골랐다는 후회가 든다.

그럴 때 나는 책걸이에 의미를 둔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꼭 책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

삶의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언가 얻으려고 한다면 너무 무거운 삶이 될 것이다.

때로는 일분일초가 아깝다며 치열하게 살기도 하지만 때로는 두손 두발 다 놓고 멍때리고 앉아있기도 한다.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멍때리고 앉아 있었던 시간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어쨌든 그 시간을 살아낸 것이다.

책읽기도, 삶도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것 같다.

당장은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계속 읽다 보면, 계속 살다 보면 언젠가 책읽기의 보람도, 삶의 의미도 얻게 될 것이다.

어려운 책은 그냥 읽으면 된다.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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