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일을 하시는 분이 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공주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백제의 도읍지였던 곳이고, 옛 충청남도 도청소재지가 있었던 곳이며, 공주사범대학으로도 유명한 교육의 도시이고, 시인 나태주 선생의 문학관이 있는 곳이니까 꼭 한번 오라고 했다.
오는 길에 금강도 보고, 공주 시내를 흐르는 제민천길도 걸어보고, 세계문화유산인 공산성을 둘러보면 더없이 좋은 여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금강’이라는 말에 반가움이 몰려왔다.
대학 졸업논문으로 채만식의 <탁류>를 택했었다.
<탁류>를 통해서 본 통과의례 비스끄리한 제목이었다.
물론 당시의 분위기를 따라 여기저기서 자료들을 모아 짜깁기한 수준이었지만 그때 <탁류>에 등장하는 금강을 많이 그려보았었다.
그 후로 한반도의 서쪽을 지날 때 ‘금강’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면 반가운 느낌이 든다.
공주가 반가운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최근 공주시를 소개한 수필집이 한 권 나왔다.
석미경 작가가 쓴 <그 골목길에서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이다.
겉표지를 보면 한 여인이 골목길에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낡은 대문 앞에 긴치마를 입은 여인이다.
뒷모습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등 뒤로 책을 감추고 있다.
무슨 책일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다.
오래전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그림 같다.
어쩌면 내 고향집 근처의 어느 골목인 듯도 하다.
사진 속 여인이 소꿉친구 같기도 하고, 스무 살 언저리에 사랑을 속삭였던 연인인 듯도 하다.
누구일까?
얼굴을 안 보여주니 알 수가 없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설마 나를 기다리는 것일까?
내가 그 골목길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던가?
조심스럽게 책을 열었다.
그 여인이 내 손목을 잡고 공주의 골목길로 나를 이끈다.
봉황산 아래 아늑하게 오밀조밀 들어선 골목길들을 걸어간다.
그녀의 소개를 받으면서.
옛날에 암컷 곰이 한 마리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기에 늘 외로웠다.
어느 날 몇 명의 남자들이 금강을 건너와서 나무를 베고 있었다.
곰은 그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가까이 갔다.
곰을 본 남자들은 너무 놀라 도망쳤고 그중의 한 명은 아예 기절해 버렸다.
곰은 기절한 남자를 자신의 동굴로 데려왔다.
그리고 남자가 깨어나자 놀라지 말라며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곰은 밖으로 나갈 때면 남자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동굴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둘이 사랑을 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여럿 낳았다.
어느 날 곰이 실수로 동굴 입구를 막지 못했는데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남자는 도망쳐 버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곰은 너무나 슬퍼서 금강 물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 전설을 따라 그곳을 ‘곰나루’라 불렀다.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고 했고 후에 곰나루와 비슷한 음으로 그곳을 ‘공주(公州)’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전설이 있어서 그럴까?
공주(公州)의 ‘공(公)’은 상대방인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암곰이 남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을 여인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공주에 가면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제민천에서 웃통 벗고 멱을 감던 소꿉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하숙집에서 함께 먹고 공부했던 청춘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호서극장에서 로미오와 쥴리엣을 보며 사랑을 속삭였던 연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추억 속의 그 녀석들을 만나고 또 그녀들을 만나서 함께 차 한잔 마시자고 권하고 싶다.
기왕이면 <루치아의 뜰>에서 향이 짙은 홍차를 마시자고 하겠다.
거기는 우리의 비밀 아지트라 할 수 있겠다.
벽 한 귀퉁이에 정태춘과 박은옥의 엘피판도 있으니 옛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좋다.
배가 고프면 그때는 무궁화회관에 가서 배 터지도록 먹고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