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남한산성을 한 바퀴 둘러본다.
로터리주차장에 주차한 후 남문으로 가서 서문과 북문을 거쳐 다시 로터리로 내려오면 1시간가량 걸린다.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을 빼먹었다면 북문을 거친 후 자동찻길을 가로지르면 산성이 이어져 있는 게 보인다.
그 산성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동문이 나온다.
남한산성의 큰 문인 동서남북문을 다 돌아보려면 길게는 네댓 시간이 걸린다.
남한산성은 돌로 쌓았다.
흙으로 성을 쌓은 몽촌토성과 비교해 보면 역시 돌로 쌓은 성이 더 견고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청나라에 항복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난리가 나면 재빠르게 피신하기 위함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백성이 부역에 나서야만 했다.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니까 집마다 한 명 이상의 일꾼을 내보내야 했을 것이다.
산 위에서 살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테니까 산 밑에 살던 사람들이 부역에 나서야 했을 것이다.
남한산성의 북쪽은 한양과 잇닿아 있는 곳이니까 그곳의 사람들을 부역에 동원시키기는 좀 어려웠을 것 같다.
한양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은 귀한 몸이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한산성의 남쪽에 살던 사람들이 부역에 나섰을까?
내 생각은 그렇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험한 일을 시켜도 괜찮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남한산성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은 ‘성남시’가 되었다.
어쨌든 400년 전에 내가 이 동네에서 살았다면 영락없이 남한산성 증축공사에 끌려갔을 것이다.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400년 전에 우리 집안에서 대단한 인물이 나온 것 같지는 않다.
신라 초기에는 왕족이었지만 그 후로는 평범하게 살아온 게 우리 박씨들이다.
언젠가 남한산성을 돌다가 이렇게 큰 돌을 어떻게 이곳까지 운반해 왔을지 의아해했던 적이 있다.
산 밑에서 지게에 돌을 싣고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자빠지면 돌에 깔려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한산성 도립공원이 시작되는 지점에서부터 남한산성의 남문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올라가 봤다.
내 걸음으로 30분이 걸렸다.
그런데 400년 전 사람들은 나처럼 등산화를 신고 오르지 않았다.
짚신이나 맨발로 올라갔을 것이다.
등에 돌을 짊어지고 지게에 돌을 올려놓고.
하루 일당은 제대로 받았을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얼마 전에 병자호란이 끝나서 막대한 양의 전쟁보상금을 청나라에 내주었던 조선이었다.
나라 곳간이 텅텅 비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남한산성을 쌓은 백성들에게 일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백성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임금은 하늘이 내려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참 많이 변했다.
임금이 없어지고 양반이라는 계급도 없어졌다.
양반들만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읽게 되니까 지식이 쌓이고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신과 임금만 높이던 음악과 미술과 문학이 어느 순간부터 나의 노래가 되었고 너의 그림이 되었고 우리의 글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널리 퍼졌다.
인권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이 빈번히 터져 나온다.
만약 오늘날에 남한산성을 증축한다면서 백성들에게 부역을 나오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귓등으로 들을 것이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은 손을 번쩍 들고 물어볼 것이다.
“일당은 얼마로 쳐 주는 거예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못마땅하면 나는 다시 따져 물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로 일하는 데는 없어요.
그리고 저는 일당이 비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