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도 읽어도 도통 무슨 내용인지 깨닫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로 자연스럽게 흐름이 이어져야 하는데 방금 넘긴 페이지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책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그렇다.
내 수준에서는 해석이 안 된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이런 책을 읽을 때면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철학자도 아닌데 이 책을 꼭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내용도 어렵지만 분량도 방대하다.
그래서 더욱 진도가 안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읽어야 하나? 16년째 책 읽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입장에서 내 대답은 그럼에도 읽으라는 것이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라는 심정으로라도 읽으라는 것이다.
깨달음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읽으라는 것이다.
끝까지 읽으라는 것이다.
아무리 얇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읽어서 그 책의 내용을 다 알 수는 없다.
전체 줄거리는 파악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문장 하나하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쉬운 책이라며 그 책의 내용을 다 안다고 큰소리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무척 읽기 쉬운 책이다.
아이들도 잘 읽는다.
분량도 얼마 안 된다.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어린왕자>를 지금 다시 한번 읽어보라.
그러면 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린왕자>가 이런 내용이었나 하는 생각에서부터, 이런 글귀도 있었네 하는 생각까지 들 것이다.
<어린왕자>가 굉장한 철학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읽을 때마다 깨달음이 달라질 수 있다.
그만큼 우리가 그 한 권의 책을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라고 해서 포기할 필요는 없다.
끝까지 읽는 게 낫다.
우리 옛 선조들은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로 책 읽기를 독려했다.
책 백 권을 읽으라는 말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을 백 번 읽어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책을 읽는 중에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처음에는 한 단어가 눈에 들어오고 그다음에는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책의 내용이 확 다가올 때가 있을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란 책도 그럴 것이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굉장히 어려운 책이지만 이 책을 읽고 또 읽다 보면 언젠가는 칸트의 생각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첫술에 배부를 리는 없다.
태산은 한걸음에 올라갈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읽고 또 읽다 보면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끝장을 넘기게 되고, 먹고 또 먹다 보면 배부르게 되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태산도 정복하게 된다.
그런 마음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보려고 한다.
갓난아기는 엄마 젖을 먹는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이유식을 먹어야 한다.
이유식을 처음 접한 아기는 이유식이 불편할 것이다.
색다른 맛이고 소화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리질을 하면서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유식을 먹고 또 먹다 보면 이유식이 편해질 때가 온다.
그런 다음에야 고기도 먹고 김치도 먹을 수 있다.
책 읽기도 이런 과정을 겪는다.
처음에는 책만 펴면 졸음이 몰려올 수 있다.
한 페이지 읽기가 너무 힘들 때도 있다.
한 권을 읽는 데 일주일이 걸리기도 하고 한 달이 걸릴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읽다 보면 책 읽기가 수월해진다.
이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분야의 책에도 관심이 간다.
점점 더 어려운 책에 도전하게 된다.
나에게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그런 책이다.
이미 읽다가 덮은 적이 한두 번 있다.
이제 다시 도전하고 있다.
이번에는 끝까지 가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