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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ug 27. 2024

갑작스런 설악산 당일 종주, 한계령-대청봉-오색(2)


수풀길을 헤치고 한참을 갔나 싶었을 때 눈앞이 확 트였다.

중청대피소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예전의 중청이 아니었다.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여기서 라면을 끓여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공사판을 지나가는데 안개가 자욱했다.

대청봉까지 마지막 500미터를 올라야 한다.

점점 마비되어 가는 다리를 부여잡고 오르다 쉬다를 반복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갑자기 ‘악!’하는 비명이 나에게서 터져 나왔다.

뭔가 꽉 찌르는 느낌이었는데 왼쪽 팔뚝 안쪽을 보니 새끼손가락 한마디쯤 되는 땅벌이 붙어 있었다.

급하게 땅벌을 떨어뜨렸다.

너무 열받아서 그놈을 발로 밟아버렸다.

겁이 났다.

재빨리 팔토시를 걷어보았다.

벌침은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팔토시로 팔뚝을 묶어 압박했다.

신용카드를 꺼내서 벌에 쏘인 자리를 쓸어내렸다.

독을 빼내기 위한 응급조치다.

끝청을 지나 조금만 힘을 내니 멀리 중청이 보인다. 아! 기억속 중청대피소. 이제 다시 그곳은 없다. 한창 공사중인 중청
대청봉 바로 밑에서 땅벌에 쏘였다. 대청봉을 지키는 땅벌이었을까? 독이 퍼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한 5분쯤 앉아 있었나?

벌에 쏘인 부분은 살짝 부어올랐지만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몇 발자국 걸었는데 대청봉이었다.

이런! 대청봉 10미터 아래서 벌에 쏘인 것이다.

거의 정상까지 안전하게 왔는데 정상 바로 밑에서 큰일 날뻔했다.

하산도 그럴 것이다.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저녁 5시가 다 되어서 그런지 대청봉에는 고작 4명이 있었다.

나까지 합쳐서 5명이다.

대청봉 정상석 사진을 찍기 위해 30분 넘게 기다렸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찍고 싶은 만큼 맘껏 찍었다.

그 후에 편히 앉아서 밥을 먹었다.

쿡앤쿡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아날로그가 좋다.

집에서 준비한 주먹밥 한 봉지, 김치 한 봉지, 컵라면,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물.

정상에서 먹는 라면 국물은 뭐라 형용할 수가 없다.

거기에 주먹밥을 말고 볶은 김치를 곁들이니 왕의 식탁이 부럽지 않았다.

대청봉 정상 1708미터에 오르기 위해 아침부터 나는 그렇게 움직였나 보다.
대청봉의 정취를 한 모금 먹고 사발면과 주먹밥 그리고 볶음 김치로 후한 식사를 했다. 세상에 어떤 식탁이 부러우랴!


정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8시까지는 한계령휴게소에 도착해야 차를 뺄 수 있다.

하산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시간 만에 한계령으로 돌아가려면 오색으로 내려가서 오색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대청봉에서 오색까지는 5킬로미터다.

업다운이 많은 길이 아니라 줄곧 내려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2시간 정도면 하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5시 6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역시 내려가는 길은 가뿐했다.

3리터 넘는 물도 거의 다 마셨고 물병 2개 정도만 남았으니 배낭도 가벼웠다.

1시간쯤 내려오니 계곡물이 흘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미 절반쯤 내려왔으니 잠시 여유를 부려도 되었다.

짐을 내려놓고 계곡에 내려가서 얼굴을 씻었다.

‘와! 시원하다. 살 것 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시간은 저녁 6시를 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7시에는 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청봉에서 오색 남설악탐방지원센터까지는 5킬로미터다. 쭉 내리막길이니 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다.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오르는 길은 무척 힘들 것이다. 곳곳에 안전쉼터가 있다. 1시간 내려갔더니 계곡이 있었다. 살 것 같았다.


산 고개를 한두 개 넘었을 때 안전쉼터에서 쉬고 있던 분이 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지날 참이었는데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선생님, 물 있으면 한 병만 주실 수 있으세요.” 했다.

부부와 대학생인 아들이 왔는데 부인이 탈진한 상태였다.

설악산을 너무 만만하게 여기고 온 것 같았다.

나처럼 한계령에서 출발해서 대청봉을 찍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자동차도 한계령에 두고 왔단다.

8시 이전에 한계령휴게소 주차장에서 차를 빼야 한다는 정보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땀을 많이 흘려서 염분이 필요한 것 같은데 자기들은 물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나에게 딱 물 한 병이 남아 있었는데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 싶었다.

너무 감사해하며 물을 마셨다.

점심식사는 어떻게 해결했냐고 물었더니 샌드위치를 먹었다고 했다.

아, 산에서는 라면을 먹어야 하는데!

염분 보충이 전혀 안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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