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찌뿌둥했다.
땀 좀 흘리고 싶었다.
실내 테니스장에 갈까 생각도 했는데 땡기지 않았다.
좀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
걸으면서 별별 생각을 하고 걸으면서 잡다한 생각을 지우고 싶었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내와 딸에게 불곡산에나 갔다 오겠다고 했다.
야간산행이다.
두 여자는 도무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밤에 누가 산에 가냐는 표정이다.
이 밤에 나 같은 사람이 산에 간다.
야트막한 산이니까 여러 사람들이 밤에도 간다고 했다.
핸드폰을 꺼내서 청계산 야간산행을 검색해서 보여줬다.
이번에는 왜 청계산을 검색했냐고 한다.
청계산에도 이렇게 야간산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랬다고 했다.
헤드랜턴을 착용하면 야간산행도 문제없다고 했다.
아내와 딸은 헤드랜턴이 문제가 아니라 왜 밤에 산에 가냐는 말만 반복했다.
아내와 딸은 내 마음을 모르고 나는 아내와 딸의 마음을 모른다.
집에 와서 분리배출할 쓰레기들을 후다닥 치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등산화를 신고 현관을 나서면서 다녀오겠다고 했다.
불곡산이냐고? 그럴 수가 없다.
불곡산은 올라가고 내려오는 데 30~40분이면 끝난다.
그 정도로는 내 찌뿌둥한 마음을 풀 수가 없다.
차를 타고 청계산으로 달렸다.
밤이어서 그런지 20분 걸렸다.
원터골 등산로 입구에 주차할 빈자리가 많았다.
식당 주차장인데 밤 시간에 거기 주차할 차량이 없을 테니 편한 곳에 주차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57분이었다.
가로등 불빛은 차분히 내려 비추고 있었지만 주위에 인기척은 없었다.
기념사진 한 컷 찍고 곧바로 산으로 들어갔다.
헤드랜턴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있었다.
이정표인가 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두 개의 불빛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고양이였다.
자기가 청계산을 지키는 고양이인 줄 아나 보다.
“쉭!” 소리를 질러 고양이를 내쫓았다.
졸졸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을 지나가는데 그때까지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던 한 가족이 있었다.
이제 짐을 정리하고 집에 가려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 말고도 더 있을까 싶었는데 산행 내내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그 밤에 청계산을 걷고 있던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날 청계산의 주인은 나였다.
15분 정도 부지런히 올라가 약수터에 다다랐다.
땀이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헉헉거리는 가뿐 숨을 달래고 물 한 모금 마셨다.
이어지는 숲길을 걷고 나무계단길을 올랐다.
1440개의 나무계단을 오르면 매봉에 다다른다.
숲이 깊어지면서 덜컥 공포감이 생겼다.
그만하고 여기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뭔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럴 때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돌아봐도 아무것도 없다.
괜한 기분이다.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가기로 했다.
15분 더 걸었더니 헬기장에 도착했다.
절반 넘게 왔다.
숨이 턱에 찰 때쯤에는 잠깐 멈춰서 물을 한 모금씩 마셨다.
나무계단에 적혀 있는 숫자가 1000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다리에 더 힘이 솟았다.
돌문바위를 지나면서 한 컷 찍고 그 기세를 몰아 매바위까지 올랐다.
하늘이 밝은 밤이었다.
매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불빛은 찬란하였다.
송파 쪽에서 오른쪽으로 내가 살고 있는 분당 방면을 사진에 담았다.
다시 발길을 옮겨 매봉에 다다랐다.
출발한 지 55분 만에 도착했다.
매봉에서의 전망도 매바위 못지않게 좋다.
저 많은 불빛보다 네댓 배나 많은 사람이 이 도시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안녕하셨으면 좋겠다.
짤막하게 기도를 드리고 하산을 시작했다.
등산보다 하산이 어려울 수 있다.
스틱의 도움을 받아 조심조심 발을 디뎠다.
30분 정도 걸렸다.
총 산행 시간 1시간 40분.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불곡산도 아니고 청계산”
아내는 아마 나를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내가 청계산 간 것을 아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했더니 매봉 정상석에 '청계산'이라고 적혀 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