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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우리나라
풍경의 완성은 사람입니다
by
박은석
Nov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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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말 11월 초가 되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거린다.
꽃이 핀다고 해도 길어야 10일이라고 했다.
단풍도 그렇고 노란 은행도 그렇다.
이 시기의 1주일을 놓치면 단풍도 은행도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부지런해야 단풍 경도 할 수 있고 은행 구경도 할 수 있다.
올해는 더운 날이 길어지는 바람에 단풍이 늦었다.
단풍이 들려면 최저 기온이 섭씨 5도 밑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올해는 그 시기가 늦어졌다.
다른 때 같으면 10월 중순에 설악산 단풍을 시작으로 해서 11월 초가 되면 단풍 구경이 다 끝났을 텐데 올해는 11월 초가 단풍 절정이 된 것 같다.
생각난 김에 여주 강천섬으로 훌쩍 떠났다.
10여 년 전에 4대강 정비 사업을 펼칠 때가 있었는데 그때 얼떨결에 강천섬이 생겨났다.
넓은 땅에 잔디를 입히고 은행나무와 미루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자라서 가을의 정취를 맘껏 발산하게 되었다.
햇살 따사롭고 바람 시원한 날에 강천섬을 찾았다.
주차장에 내려서 강천섬으로 들어가는 길 양편으로 갈대와 억새가 어울리게 피었다.
갈대는 물가에 억새는 산과 들에 피는데 강천섬은 얼떨결에 섬이 되어서 그런지 갈대와 억새가 서로의 영역을 지키면서 사이좋게 피어 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어쩌면 내가 억새라고 생각한 것이 갈대인지 모르겠고 내가 갈대라고 생각한 것이 억새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갈대든 억새든 그 이름을 아는 게 나에겐 중요치 않았다.
그냥 가을의 배경이라고 해도 충분하다.
하늘에는 새들이 브이 자 모양을 이루며 날아가고 있었다.
저것이 무슨 새인지 나에겐 중요치 않았다.
저것들도 가을의 배경이라고 하면 충분하다.
캠핑 장비를 짊어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온 사람도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도 모두 강천섬의 가을을 타고 있었다.
강천섬 초입의 은행나무는 별로 예쁘지 않다.
몇 년은 좀 지나야 은행잎이 흐드러지게 달릴 것이다.
넓은 잔디밭을 하나 지나면 강천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은행나무들이 나온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은행나무들에서 무수한 은행잎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은행잎들을 두 손에 담았다가 하늘로 날리는 사람, 떨어지는 은행잎을 두 팔로 받으려는 사람, 은행나무 앞에서 하트를 그리며 서 있는 사람, 은행잎을 방석 삼아 은행나무 아래 앉아 있는 사람.
제각각의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고등학교 동창생 같은 네 명의 중년 여성들이 폼을 잡더니만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나는 마치 무슨 빚을 진 사람처럼 그들의 요구에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응한다.
강천섬에서는 사진을 부탁하는 이들이 사진을 부탁받은 이보다 더 당당하다.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며 최대한 배경에 잘 어울리도록 사진을 찍어드렸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에 몇 초 전에 지나간 과거가 한 컷의 사진으로 남겨졌다.
모두 밝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 노란 은행잎을 밟고 샛노란 웃음을 띠며 사진을 찍었다.
풍
경이 좋다.
그
풍경에 찍힌 사람들도 좋아 보인다.
아니
풍경과 사람이 잘 어울린다.
스마트폰을 돌려드
리며 “풍경 참 좋습니다.”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내 입에서 한마
디가 더
나왔다.
“
풍경의 완성은 사람입니다.”
그분들이 까르르 웃었다.
나보다 몇 년은 더 산 분들인데 나보다 더 즐겁게 웃었다.
강천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좋은
풍경을 찾아서 여기저기 기웃거렸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곳이라면 나도 가보고 싶었다.
그
풍경에 물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
풍경에 사람이 없으면, 내가 없으면 무언가 허전할 것 같다.
주인공이 없으니까.
모든
풍경은 사람이 있어야 완성된다.
풍
경의 완성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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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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