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울었다.
아버지는 눈물 많은 나에게 남자는 일생을 살면서 세 번 우는 것이라고 하셨다.
갓 태어났을 때 울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울고 나라님이 돌아가셨을 때 운다고 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던 아버지는 나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허나 나는 잘 울었다.
어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려면 눈물이 필 돌았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주인공이 슬퍼하는 장면이 나오면 내 눈에도 눈물이 비쳤다.
웃긴 이야기를 들을 때도 눈물이 났고 웃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알려줄 때도 눈물이 났다.
눈물은 습관처럼 내 눈에서 빠져나왔다.
지금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눈물이 난다.
어른이 눈물을 보이는 게 창피해서 사람들 눈을 피해 눈물을 훔칠 때가 많다.
의사들은 눈물을 흘리는 게 좋은 현상이라고 한다.
눈물이 눈 속에 있는 먼지를 씻어낸다고.
도대체 내 눈에는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먼지가 들어 차는 것일까?
요즘은 사람들이 나에게 얼굴 좋아 보인다고 한다.
얼굴이 밝다고 한다.
아마 살이 쪘기 때문에 피부가 통통해서 좋아 보이는 것일 테고 기름기가 좔좔 흘러서 밝아 보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면 내 말투를 듣고 내가 서울 사람인 줄 아는 이들도 있다.
스무 살 때 서울에 올라와서 30년 넘게 서울 말투를 써서 그런가 보다.
하기는 내 입에서 고향인 제주도 사투리가 나올 때는 거의 없다.
어머니와 전화 통화할 때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내가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나의 인상착의를 대라면 중년 남자 평균 키에 얼굴 반반하고 서울 말투를 쓰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매일 사무실에 앉아 있고 험한 일을 하지 않기에 손은 반질반질하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으니 멋있어 보인다고 한다.
고생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 같다고 한다.
나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불속에 웅크리고 누워서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던 때가 있었다.
하늘을 향해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뒤틀려 버렸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던 때가 있었다.
사정이 조금 나아지는가 싶으면 또 다른 엄청난 일이 터지곤 했다.
내 인생을 저주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래도 살다 보면 뭔가 깨달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입술 꽉 다물곤 했다.
삶을 놓아 버리고 싶어도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삶은 나 혼자 놓아 버린다고 해서 놓아지는 게 아니었다.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노찾사가 부른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로 시작하는 노래를 입버릇처럼 부르며 지냈다.
짭조름한 맛이 나는 눈물을 음료수처럼 마시며 지냈다.
그땐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은 게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각 사람에게 웃음 한 바가지와 울음 한 바가지를 쥐어주고 보내신다.
평생 살아가면서 함지박 같은 웃음 한 바가지는 터뜨리고 울음 한 바가지의 눈물은 흘린다.
누구는 일찍 웃음 바가지를 터뜨리고 누구는 일찍 울음 바가지를 터뜨린다.
대부분의 경우는 웃음 바가지에서 조금 울음 바가지에서 조금을 꺼내 적당히 섞으면서 산다.
눈가에 눈물 한 방울 찍고 돌이키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산다.
사람들이 나에게 밝아 보인다고 잘 웃는다고 하면 나도 한마디 한다.
예전에 많이 울었기 때문에 지금은 크게 웃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예전에 많이 울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울음 항아리가 얼마나 큰지 나는 모른다.
혹시 나의 웃음 항아리가 다 터진 다음에 울음 항아리가 “여기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다”라고 외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