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가방끈이 짧았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오애순처럼 아버지는 꿈도 많았고 재능도 많았다.
할아버지가 조금만 신경을 쓰셨더라면 아버지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을 거다.
아버지 열 살 즈음에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팽개치고 일본으로 가셨다.
돈을 벌러 가신다고 하셨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본에서 새 장가를 드셨고 거기서 아들 낳고 잘 사셨다.
빈손으로 일본에 가시지는 않으셨을 거다.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다 들고 가셨을 거다.
제주도에 남은 할머니와 아버지, 삼촌과 고모들은 갑자기 가장을 잃고 재산을 잃은 난민 신세가 되었다.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로는 제주 4.3 때 삼촌과 고모 한 명이 굶어서 죽었다고 했다.
원래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다.
가난이 도둑처럼 찾아온 집안이 된 것이다.
할머니의 큰아들이었던 내 아버지는 열 살 즈음부터 소년가장처럼 사셨다.
아버지의 가방끈이 짧은 이유이다.
담임선생님은 가정 조사를 한다며 우리들에게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지 냉장고와 전화기가 있는지 물어보셨다.
해가 바뀌면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또 물어보셨다.
그것만 물어보신 게 아니다.
부모님의 학력이 어떻게 되는지도 물어보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끄러웠다.
아버지의 학력은 국민학교 중퇴이다.
오애순이도 국민학교는 졸업했던데, 아니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고등학교 중퇴이던데 내 아버지는 그에 한참 못 미쳤다.
다달이 내야 하는 월사금이 없어서 그러셨을 거다.
학교에 가야 할 시간에 아버지는 밭으로 갔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 집 농사일을 거들기도 했다.
서러운 십대의 청춘이었을 것이다.
모두들 잠든 밤에라도 책을 읽고 싶으셨다고 했다.
몰래 불을 켜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불빛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담요로 창문을 가리면서.
가난도 설움도 고된 노동도 아버지의 공부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동네에 예배당이 생겼다.
저녁에는 예배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모가 전해준 그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지 곧장 예배당으로 가셨다.
국민학교는 그만둬야 했지만 예배당 야학은 놓치고 싶지 않으셨다.
예배당 야학에서 아버지는 <천로역정>을 배웠고 창가가사를 개사한 찬송가를 배우셨다.
하나를 배우면 또 하나를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아버지고 그러셨다.
예배당 야학에서 글을 배운 후로 아버지는 다양한 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다.
글씨도 배우고 난을 치는 방법도 배우고 그림도 배우고 일머리도 배우고 사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지혜도 배우셨다.
농사도 배우고 가축을 치는 것도 배우고 재산을 증식하는 방법도 배우셨다.
이십 대를 거치는 동안 아버지는 만 평이 넘는 감귤 과수원과 여러 필지의 밭을 소유한 자수성가한 부자가 되었다.
아무도 아버지의 가방끈을 묻지 않았다.
옆 사람의 사업 보증을 서는 바람에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사채업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몇 번의 용틀임을 했지만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
쉰셋의 짧은 삶을 살다 가셨다.
한도 많고 원망도 많고 후회도 많으셨을 거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에게 그런 걸 얘기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나에게 가장 많이 이야기해 준 것은 ‘사람’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사람 낳고 돈 낳았지 돈 낳고 사람 낳은 게 아니다.”
“사람 인(人) 자를 보면 작대기 두 개가 서로 기대고 있다. 사람은 이렇게 서로 기대면서 살아야 한다.”
가끔 나도 몽니를 부리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마음이 드는 밤이면 나는 열 살로 돌아가 아버지 앞에 무릎 꿇어앉아 있다.
“사람 인(人) 자가 어떻게 쓰는지 아니?”
아버지가 묻는다.
문득 정현종 선생의 시 <비스듬히>를 보는데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를 무릎 꿇리고서 열심히 가르치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다.
서로 비스듬히 기대며 살아야 한다.
안 그러면 쓰러진다.
내가 기대려고 하는데 남이 기대게 해 주지 않으면 내가 쓰러진다.
마찬가지로 남이 기대는 데 피하면 안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쓰러진다.
서로 기대며 살아야 한다.
서로 비스듬히 기대며 살아야 한다.
그게 사람이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