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박사라 불리는 우종영 선생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를 읽다가 ‘해거리’라는 말을 알게 됐다.
열매를 잘 맺던 나무가 어느 해가 되면 갑자기 열매 맺기를 포기해 버린다.
열매가 맺히지 않으니 농사짓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 펼쳐진다.
혹시 병충해를 입었나 살펴보아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동안 많은 열매를 맺느라 땅의 기력을 다 빼앗아 먹었나 싶어서 땅을 살펴보아도 땅의 문제도 아니다.
농약을 치고 비료를 듬뿍 뿌려주어도 나무는 요지부동이다.
꼭 삐친 아이처럼 나무는 꽃을 피워야 할 때가 되어도 꽃을 안 피운다.
간신히 몇 송이 꽃을 피워도 열매가 영 형편없다.
이런 나무가 한 그루가 어니라 여러 그루가 된다면 심장이 쿵쾅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수를 하고 열매를 팔아야 농약값도 갚고 비료값도 갚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데 그 계획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나무가 열매 맺기를 거부하는 이런 현상을 ‘해거리’라고 한다.
말 그대로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고 한 해를 거른다는 뜻이다.
어느 한 해에 열매를 너무 많이 맺면 그다음 해에는 나무가 해거리를 한다.
열매는 보이지 않고 빈 가지와 잎사귀만 무성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서 열매 맺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사실 나무 입장에서는 열매를 맺어야 성공한 것이다.
나무가 번식하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열매를 맺어야 자기를 닮은 또 다른 나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나무가 열매를 하나 맺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뿌리가 땅속의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줄기와 가지가 그것들을 운반해 주어야 한다.
특히나 수백 장의 잎사귀가 광합성 작용을 해 주어야 한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잎사귀들은 다 말라비틀어진다.
나무에게 열매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 얻는 최고의 보물이다.
여러 해에 걸쳐서 열매 맺는 데만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다면 나무는 어떻게 될까?
뻔하다.
나무는 탈진하고 말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빠른 사람들은 100미터 달리기 선수 들이다.
그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 근육이 터져나갈 것 같이 압도적이다.
100미터를 뛰는 동안 숨을 한 번 정도밖에 안 쉰다고 한다.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결승선을 통과한 후에는 지쳐서 쓰러진다.
계속해서 그다음 100미터를 9초, 10초에 달릴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다.
계속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과일을 맺을 수는 없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무의 힘은 줄어들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이 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된다.
이때 억지로 영양분을 투여하면서라도 나무에게서 열매를 맺게 한다면 그 나무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
나무도 하나의 생명이다.
생명은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없다.
지칠 때가 찾아온다.
지치면 쉬어야 한다.
쉬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결승선을 지난 후 주저앉아 쉬는 것처럼 나무도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시간이 나무의 ‘해거리’ 시간이다.
좀 아까운 것 같지만 그 한 해에는 열매 맺기를 과감히 포기한다.
그러면서 망가져버린 기관이나 조직이 없는지 살핀다.
사실 여러 해 동안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느라 뿌리도, 줄기도, 가지도, 이파리들도 많이 힘들었다.
그들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해거리의 시간이다.
해거리하는 해의 주인공은 열매가 아니다.
그동안 조연으로 지냈던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이파리들이 주인공이다.
나무가 이들의 희생과 노고를 생각해 주기에 이들은 해거리의 시간에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