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중순이면 설악산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
이 계절을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설악산의 단풍을 마음에 담아 오고 싶었다.
언젠가 배낭을 다 챙겼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포기했던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괜찮았다.
동쪽 하늘에서 붉은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서울을 지나 양평, 가평, 춘천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생기가 넘쳤다.
홍천 톨게이트를 나오면 고향동네 같다.
스물다섯, 여섯, 일곱 살 때 이곳에서 군복무를 했다.
남들은 다시는 쳐다보지 않겠다고 하는데 나는 홍천에 오면 스물다섯 기분이 든다.
화양강 휴게소에서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출발이다.
원통, 인제를 지났다.
여기쯤 오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는 푸념이 들린다.
이제는 사라져도 한창이어야 하는 말인데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걸 보니 말 한마디의 생명력이 참 길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미리 마음을 정했지만 여기쯤 오면 짧은 갈등이 생긴다.
12선녀탕을 볼 것인가, 한계령으로 올라갈 것인가, 오색온천으로 갈까, 백담사로 갈까.
운전대를 트는 방향이 그날의 등산코스가 된다.
기왕 큰맘 먹고 왔는데 정상을 밟자.
한계령의 풍광도 좋지만 단풍철에는 주차할 수가 없다.
오색 코스는 시간은 적게 걸리지만 그만큼 볼거리도 적다.
기왕 큰맘 먹고 왔으니 긴 거리를 걷자.
백담사 코스다.
백담사 아래 주차장 시설이 좋으니 거기에 차를 놓고 셔틀버스로 15분 정도 올라가면 된다.
하산행 마지막 셔틀버스는 저녁 7시다.
반드시 이 버스를 타야 한다.
지난봄에는 마지막 버스 시간 때문에 대청봉 1시간 밑에서 아쉽게 하산한 적이 있다.
그때는 막차가 저녁 6시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걸어서 내려가기에는 무리다.
7킬로미터, 2시간 거리다.
종일 산행 후 밤시간에 2시간을 더 걷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조금 전부터 하늘이 흐려졌다.
산 하나 지났을 뿐인데, 터널 하나 건넜을 뿐인데 햇살이 사라지고 가는 빗줄기가 내린다.
버스 기사는 최근 몇 주째 계속 비가 온다고 푸념이었다.
언제는 비가 안 온다고 원성이더니 지금은 비가 많이 온다고 투정이다.
그렇게 사는 게 사람이다.
비옷을 꺼내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가을비를 맞는 것도 추억일 테니.
산뜻하게 출발했다.
가는 빗줄기 덕분에 시원하게 걸었다.
백담사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12킬로미터가 넘는다.
산길은 보통 한 시간에 2킬로미터쯤 걷게 되는데 이 길의 8킬로미터 정도는 완만한 길이다.
2시간 정도면 된다.
그다음부터 좀 힘든 길이 나온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것 같다는 ‘깔딱고개’도 있다.
그 고개 너머 봉정암이라는 암자가 나온다.
거기서 잠시 쉬고 좀 더 힘을 내면 소청, 중청, 대청봉이다.
8시 30분에 오르기 시작한 등반이었다.
계곡물 옆에서 컵라면에 즉석밥을 먹었다.
이보다 더 좋은 식사가 없다.
입에서 단내가 날 때쯤 대청봉에 도착했다.
안개 자욱한 오후 2시였다.
곳곳에 손바닥만 한 눈이 쌓여 있었다.
아침에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일출을 보면서 왔는데 산 아래는 빗방울이더니 산 위에는 눈이 내렸다.
이 계절을 가을이라고 해야 할까 겨울이라고 해야 할까?
단풍 구경을 왔는데 비 때문에 눈 때문에 단풍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대청봉을 밟고 내려간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올라오는 길 5시간, 내려가는 길 4시간, 중간에 밥 먹고 쉰 시간 30분.
9시간 30분 동안 설악의 공기를 실컷 마셨다.
깜깜해질 때쯤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밝게 불을 밝히고 나를 기다리는 버스가 오랜 친구마냥 반가웠다.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풀리는지 피로가 몰려오는지 몸이 녹아들었다.
설악에서의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