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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작고 사소한 시간을 견디어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

by 박은석


몇 년 전부터 건조한 계절이 되면 몸이 반응을 한다. 손등에, 팔뚝에, 종아리에, 손가락에 뾰루지 같은 게 나타난다. 연고를 바르면 하루 이틀 들어갔다가 또 고개를 내민다. 예전에 동네 문방구 앞에 있었던 두더지 게임기를 떠오르게 한다. 피부과에서 약을 받아 오면 꽤 오랫동안 가라앉는다. 다 나았나 싶으면 또 피부를 뚫고 나온다. 불안해하는 나에게 의사는 나이 들어가는 증거라고 했다. 피부 조직이 약해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피부가 건조하니까 물을 많이 마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피부에 뾰루지 몇 개 난 것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다. 몸이 근질거리는 것 때문에 기분이 언짢다. 별것도 아닌 것이라고 무시할 만도 한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사소한 것이 전부를 지배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점 하나 잘못 찍으면 그간 수고했던 모든 그림이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된다. 부지런히 운동을 해서 몸을 다지고 마음수련을 해도 뾰루지 하나가 몸과 마음을 다 망쳐버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거대한 세상이지만 이 거대함은 아주 작은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흙알갱이들이 모여서 대지를 이루고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바다를 이룬다. 작은 것이니까 하나쯤 빠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뭘 모르는 무지한 생각이다. 염색체 하나 차이가 남자와 여자의 성별을 다르게 한다. 직경 1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암세포 하나가 온몸을 멍들게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독감 바이러스가 거구의 사내를 1주일 동안 끙끙 앓게 만든다. 작은 것 하나 무시했다가 큰코다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반면에 작은 것 하나 소중히 여기는 게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이고 오르고 또 오르면 태산도 오르게 되고 매일 한 삽씩 뜨다 보면 언젠가는 산을 옮길 수도 있다. 10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들도 처음에는 한 사람의 구독자를 얻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아주 작은 그 하나가 시작점이다. 아주 작은 그 하나들이 모여서 거대한 하나가 된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까레리나>의 첫 문장은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의 차이는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형태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형태로 불행하다.”


행복한 가정을 들여다보면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을 들여다보면 뭔가 하나 빠져 있다는 말이다. 그 뭔가 하나 빠져 있는 것이 한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다. 소설 속 주인공 안나 까레리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뭔가 하나 빠져 있었는데 그것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들을 놓쳐버렸다. 안나 까레리나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도 비슷한 모습으로 저마다의 부족한 것에 치중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도 모든 것이 충족되었던 때는 없다. 뱃속에 있는 태아도 뭔가 부족하기에 발길질을 하는 것이고 갓난아기들도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떼를 쓰며 운다. 우리는 항상 뭔가 부족한 채 살아간다.




성공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너무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뭔가 부족한 게 있기 때문이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그가 오히려 나를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왕자는 거지를 부러워하고 거지는 왕자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게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그것이 그곳에 그 모습으로 있기까지는 숱하게 많은 사소한 일들을 겪어냈다. 그 사소함들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그 시간에 그곳에 존재할 수가 없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이라는 시에서 그 사소한 일들을 견뎌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준다. 지금 여기에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개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순간이었지만 영원 같았다. 그 짧고 작고 사소한 시간을 견뎌냈기에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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