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잘 하지 않는다.
한때는 남들보다 온라인 세상을 더 많이 헤집고 다녔다.
하루에 5시간 이상 다음 카페를 들여다보던 때도 있었다.
페이스북에 내 이야기를 올리고 트위터에 소식을 전하던 때가 있었다.
조회수가 올라가고 댓글이 많아지고 팔로워들이 많아지는 것에 온통 신경을 집중했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SNS로 먹고살려면 거기에 몰입해야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SNS는 단지 내 근황을 소개하는 정도로 단순하고 짤막하게 사용하려고 한다.
혹시나 나중에 유명 유튜버가 된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런 것에 관심이 거의 없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리는 것도 내 글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삼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간간이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면 나와 연결된 사람들의 근황을 알 수 있다.
대개 자신이 지금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있어서 너무 좋다는 식의 소식이다.
자기 자랑이 주를 이룬다.
잘났다 다들, 정말! 경치 좋은 데서 사진을 찍어 올리고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진을 올린다.
세계 여기저기, 전국 방방곡곡에 다녀왔음을 인증하는 사진으로 도배를 한다.
그 마음 깊은 데는 아마 자기가 지금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세상을 알려면 우선 많은 곳을 둘러보며 직접 경험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휴가를 내고 돈을 들여서 여행을 떠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여권에 찍힌 도장들을 세어 보면서 몇 개 나라를 다녀왔는지 헤아린다.
그만큼 세상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따지고 보면 한 나라에서 기껏해야 며칠을 보냈을 뿐이면서!
18, 19세기의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 여행을 해 보는 게 꿈이었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그 찬란함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오려는 여행이었다.
워낙 비싸고 긴 시간을 들이는 여행이어서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고 불릴 정도였다.
음악가를 꿈꾸던 젊은이도 화가를 꿈꾸던 미술학도도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괴테도 그 대열에 합류했고 후에 <이탈리아 여행기>라는 작품을 남겼다.
뭔가 큰 뜻을 품은 젊은이라면 이탈리아를 한 번은 다녀와야 한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집 떠나 다른 나라에 다녀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잠을 잘 것이며 먹거리는 어떻게 해결할지 가장 기초적인 생존 전략부터 세워야 했다.
오늘날의 배낭여행족, 워킹 홀리데이족들이 그 당시에도 많았다.
그들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는 전략으로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랜드 투어를 마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까?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너무나 가난해서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일평생 고향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며 살았다.
임마누엘 칸트는 원체 몸이 약해서 멀리 여행을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평생 고향 동네를 떠나지도 못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하는 게 그의 하루 일과였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촌놈 중의 촌놈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것이다.
그러나 한 세바스찬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고 임마누엘 칸트는 유럽 대륙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를 종합하는 성과를 이루었으며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와 <목민심서>를 기록했다.
그들은 촌구석에 틀어박혀 있어도 넓은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