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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Dec 02. 2020

가난한 날에 종이학 1000마리를 접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본명 백기행이라고 하는 시인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첫 소절이다.

평안도 정주 오산학교 출신의 당대 최고 엘리트 시인이었던 백석은 평안도 사투리의 구수한 가락으로 시를 지어나갔다.

우리말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 만큼 우리말을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시집 100권을 인쇄했는데 순식간에 동이나버려서 후배인 윤동주조차 구하지 못했다.

너무 속상한 윤동주가 시집을 빌려와서 통째로 베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래서 요즘도 시집을 필사하는 분위기가 전해지고 있다.

평생 발간한 시집이라고는 <사슴> 한 권이지만 그 누구도 백석을 넘지 못한 것 같다.




해방 후 고향을 찾아 월북했다고 해서 한동안 백석의 시는 입에도 올릴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교과서에도 백석의 시가 언급되는 것 같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대표적일 것이다.

평안도 사투리가 너무 어려워서 번역이 곁들여진 시집도 보았고 <사슴> 초판본을 복사한 시집도 보았고 백석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쓴 소설도 읽어보았다.

분명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을 텐데 백석의 삶은 가난으로 얼룩져 있었다.

시대가 지식인들을 가난으로 몰고 갔다.

운명이 그렇게 이끌었기도 했다.

백석 스스로 가난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지독한 가난 속에서 보석과 같은 시들이 탄생한 것이다.

가난한 시인이 사랑했던 그 나타샤는 언제가 기자들에게 천억 원을 줘도 백석의 시 한 과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에 김소운 선생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이 교과서에 실렸었다.

신혼부부의 이야기이다.

찬거리가 별로 없어서 아내는 남편의 밥상을 차리고 쪽지 한 장을 놓고 갔다.

그 아내의 글이 반찬이 되어 남편은 맛있게 식사를 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당장 벗어나고 싶은 것이 가난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 가난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훨씬 낫다.

가난한 삶이라고 해서 행복을 꿈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


돌이켜 보면 내 삶에도 가난한 시절에 더 많은 희망과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다.

군 제대 후 내 힘으로 얻은 첫 단칸방에서 친구와 함께 꿈을 꾸며 공부를 했었다.

딱 두 사람이 잠잘 수 있는 방, 보잘것없는 살림살이였지만 우리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벌써 그 꿈들은 다 이루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가난을 경험한다.

꼭 돈이 없어서 가난한 것은 아니다.

멀쩡하던 몸이 아프면 건강에 가난하게 된다.

유명 학술대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워낙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주눅이 든다.

지식에 가난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꼭 돈이 없을 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러니 대처를 잘 해야 한다.


군복무 중에 여자 친구 생일선물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기로 했다.

생전 처음 접었다.

고참들 눈치를 보면서 화장실에서도 접었고 내무반 식구들이 모두 다 잠든 후에도 접었다.

1년 동안 접기로 했는데 10개월 정도 걸린 것 같다.

면회 온 여자친구에게 종이학 1천 마리와 함께 사랑의 고백을 했다.

가난한 내가 줄 수 있었던 보잘것없는 선물이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났다.

그때 종이학들이 지금 책장 밑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가난한 날의 행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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