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 기억을 어떻게 믿나?

by 박은석


아이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물어보길래 “공일공”을 크게 부르다가 순간 멈추었다.

그다음이 뭐였는지 가물거린다.

섣불리 숫자를 댔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입술은 최대한 천천히 놀리면서 머릿속으로는 최대한 빨리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다.

어쩌면 전화번호쯤은 약과이다.

아이들이 오늘 무슨 학원에 가는지, 몇 시에 가는지 매번 헷갈린다.

영어학원인가 수학학원인가? 학교에서 몇 반 몇 번이냐고 물으면 정말 난감하다.

선생님 성함은 어떻게 되었더라? 분명히 들었는데, 기억한다고 했는데 모르겠다.

아이들 교육에는 관심 없는 아빠 같다.

나도 한때는 머리 좋다고, 기억 잘한다고, 암기력 괜찮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는데 이제는 간단한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치매는 아니다.

내가 기억을 잘 못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전국 주요 도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알고 있었는데 내비게이션이 등장하는 바람에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다.

삐삐를 사용할 때만 해도 친구들 전화번호는 줄줄 외웠다.

그런데 핸드폰이 나오고 그 안에 주소록 기능이 탑재되면서부터 외울 필요가 없다.

이름만 쓰고 검색 버튼만 누르면 되었다.

그것도 귀찮아서 아예 즐겨찾기 번호만 꾹 눌렀다.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손에 쥐어지니 이건 뭐, “시리야~” 한마디면 다 해결된다.

집에서도 “지니야~” 하고 부르면 텔레비전이 알아서 척척 찾아준다.

굳이 복잡한 번호를 외울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기억을 잘 못하는 것은 순전히 이 시대의 잘못이다.




그래도 가끔 내 기억력을 뽐내고 싶을 때가 있다.

논쟁이나 토론의 상황이 되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데”, “내가 분명히 보았는데”, “내가 들었는데...”라고 구체적인 경험까지 들춘다.

그런데 정말 확실히 기억하는 것인가?

보기는 보았고 듣기는 들었는데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은 것인가?


혼자 있을 때 씩씩거리면서 기억의 보따리를 풀고 찾아보면 ‘아뿔싸!’ 내가 잘못 알았던 것이 너무 많다.

‘아닌데, 이게 분명 이거였는데.’하며 다시 살펴보아도 객관적인 자료와 내 기억 사이에는 간극이 너무 크다.

내 기억만큼은 확실하다고 여겼는데 다시 보니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녔던 것인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이제 내 기억은 믿지 못할 유산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가 어딘가에 놔둔 물건을 찾느라고 하루에 평균 55분의 시간을 허비한다고 한다.

설마 그러겠느냐며 의구심을 갖지만 오늘 하루만 하더라도 핸드폰과 지갑과 열쇠를 찾느라고 허비한 시간이 꽤 있을 것이다.

매일 잊어버리고 매일 찾는 사람도 있다.

아예 물건을 두는 장소까지 마련해두지만 그곳조차도 잊어버린다.

돈다발 든 봉투를 쓰레기인 줄 알고 분리 배출해서 난리를 치는 경우도 뉴스에 종종 나온다.

꽤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그런다.


그래도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으니 천만다행일 것이다.

가끔씩은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것은 어떻게든 찾아보겠는데 자신을 잊어버리면 정말 찾기가 힘들다.

그러니 괜히 머릿속 기억을 믿고 목소리를 높이지 말자.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제시하자.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한 정보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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