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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Dec 21. 2020

마법의 외투를 꿈꾸지 말자


19세기 러시아에는 푸시킨, 카람진,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 등 걸출한 문학가들이 등장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한 나라에서 이렇게 세계적으로 위대한 작가들이 탄생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땅이 넓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문화유산 때문인지 러시아는 정말 축복받은 나라이다.

비록 20세기에 들어서 국가운영과 정책의 시행착오 때문에 조금 약해진 것 같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이다.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는 세계 최고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너무 부럽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도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글에서 다른 것은 부족하더라도 문화적으로 앞선 나라가 되기를 소원하셨는데 그만큼 문화적인 힘은 경제력이나 군사력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많은 19세기 러시아의 작가 중에 니콜라이 고골(고골리)이란 사람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가 워낙 유명해서 고골이 상대적으로 손해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그의 위상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의 소설 [외투]를 보면 당시 러시아 소시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넌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니?’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페테르부르크에 아카키예비치라는 말단 공무원이 있었다.

그는 융통성도 없고 처세술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겼다.

머지않아 겨울의 닥칠 텐데 그의 외투는 너무 낡아서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었다.

새 외투를 마련하려면 넉 달 치의 월급을 모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촛불도 켜지 않고 식사도 거르면서 지독하게 돈을 아껴 드디어 새 외투를 장만하였다.

새 외투를 입고 출근한 날 그의 마음은 날아갈 듯이 기뻤고 얼굴과 몸에서도 자신감이 가득하였다.

상관으로부터 저녁식사까지 얻어먹었다.

새 외투가 자신의 인생을 확 바꾼 것 같았고 신분도 상승시켜 준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강도를 만나서 외투를 빼앗기고 말았다.

아카키예비치는 반미치광이처럼 외투를 찾기 위해 뛰어다녔다.

경찰서장과 유력한 인사들을 찾아가서 간청도 하였다.

하지만 외투는 찾지 못하였고 사람들은 그에게 호된 거절과 호통만 쳤다.

크게 낙담한 아카키예비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아카키예비치의 인생을 외투 한 벌로 제시한 작가의 통찰력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씁쓸한 생각이 밀려오면서 주인공에게 내립다 욕을 해 대고 싶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그깟 외투에 왜 인생을 거냐고!’ 야단치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만은 없는 게 나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외투 한 벌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다가 외투를 잃었다고 삶을 다 잃은 것처럼 좌절하고 마는 그의 모습이 내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단지 그는 외투에 삶을 걸었다면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것에 인생을 쏟아놓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게 없더라도 괜찮은가? 

그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견딜 수 있는가? 

장담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새 외투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고 그러다가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질 텐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 외투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정신 차리자!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마법의 외투를 꿈꾸지 말자.

외투는 외투일 뿐이다.

나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외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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