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가 다가왔다.
며칠째 기온이 영하 20도 언저리까지 맴돌고 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나가지만 옷깃을 파고드는 찬 기운 때문에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
추위는 내가 예상하는 시간보다 먼저 쳐들어온다.
그래서 겨울을 대하는 마음은 무겁다.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비발디의 <사계>나 차이코프스키의 <사계>에서도 겨울은 묵직하다.
결코 가볍게 지날 수 없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그렇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걷는데 모퉁이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려보지만 자꾸 돌아보게 된다.
마냥 외면하기에는 마음이 무겁다.
어쩌면 그 가련한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톨스토이가 말했다.
내 마음에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사무실에는 난방시스템이 잘 작동되고 집에는 보일러가 방바닥을 따뜻하게 해 준다.
활활 타오르는 난로가 없더라도 공기가 후끈하다.
조금이라도 몸이 으스스하면 오리털 파카를 입으면 된다.
나는 지금 참 따뜻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주위를 조금만 벗어나면 사람들이 춥다고 한다.
내 주변에서 따뜻한 온기를 다 빼앗아 버렸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이전보다 더 추워졌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열량 보존의 법칙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이쪽에서 열을 많이 가져가면 저쪽에서는 그만큼의 열을 뺏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따뜻하다고 해서 세상이 다 따뜻한 것은 아니다.
내가 조금 춥게 지내면서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게 나은지도 모른다.
춥다는 것은 단순히 기온이 떨어졌기 때문에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추위가 맹위를 떨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껴안고 걷는 연인들의 마음은 따뜻하기만 하다.
사랑의 온도가 추위를 녹이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인들은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겨울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퀘이커교도들은 새로운 회원을 맞이할 때 몇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그중에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추웠을 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가장 따뜻했던 때가 언제인지 묻는다.
보통 두 질문의 대답은 비슷한 때의 일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가장 추웠을 때가 가장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따뜻함은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불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에서 온다.
그 사소한 것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자작나무>라는 시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였다.
가난하고 추웠던 시골 소년은 겨울이면 자작나무에 올라 나뭇가지를 타고 눈밭으로 뛰어내리면서 놀았다.
세월이 흘러 꽤 윤택하여졌는데 시인은 다시 자작나무를 타고 싶어 한다.
하늘 높이 올랐다가 땅에까지 떨어지는 그 아찔한 경험이 그리운 것이다.
인생은 높이 올라갔다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의 가지 타기를 즐기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세상은 사랑하기에 참 좋은 곳입니다.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눈 쌓인 자작나무 숲은 분명히 춥다.
하지만 자작나무 타기를 하는 소년에게는 추울 겨를이 없다.
높이 오르는 것도 재미있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도 즐겁다.
그 놀이를 사랑하는 소년에게는 눈 내린 겨울도 따뜻한 세상일 뿐이다.
사랑이 있다면 이 세상은 참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