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몸에 힘이 쭈욱 빠질 때가 있다.
만사가 귀찮고 아무 일도 하기 싫어진다.
그냥 멍하니 텔레비전을 틀어서 왱왱거리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자리에 눕고 싶어진다.
몸살이 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지친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할 일이 있는데’ 생각은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지못해 일을 잡아 보지만 실수만 터져 나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고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럴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슬럼프(slump)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고상한 척 영어 단어로 슬럼프라고 하니까 운동선수나 예술가처럼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나 나타나는 특별한 증세 같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겪는 증세이다.
내가 특별한 성격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자동적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슬럼프가 찾아오면 성적도 능률도 실적도 뚝 떨어진다.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두려움이 엄습한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해결 방안도 떠오르지 않는다.
괜히 애꿎은 방망이를 탓하고 축구공을 차버리고 물통을 집어던진다.
그러다가 되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가 자기 성질 못 이겨서 공에게 화풀이한답시고 엉뚱한 곳으로 공을 쳐냈다가 심판이 맞았던 적도 있다.
그 결과는 혹독했다.
그 선수는 매너 없는 행동을 했다고 그 자리에서 실격처리 되었다.
게임 끝난 것이다.
그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자리에 앉은 관중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분통이 터질 일인가?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듯이 탁월한 사람이 슬럼프를 겪게 되면 그 자신도, 주위에 있는 사람도 무척 당황한다.
하지만 슬럼프는 화를 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슬럼프는 몸의 균형과 마음의 평정이 무너졌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굳이 의학적인 지식을 덧씌우지 않더라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슬럼프는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기계처럼 지치지 않는 존재라면, 로봇처럼 감정이 없는 존재라면 슬럼프 같은 것은 오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맞이하는 것이다.
빨리 달리고 나서 숨 가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격한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이 그만큼 지치게 되어 있다.
나는 종종 편두통을 앓았다.
그래서 한번 조사해보았다.
주로 편두통이 올 때는 어떤 날인지?
그리고 편두통을 겪기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등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내 편두통은 주로 내가 쉬는 날 찾아왔다.
그리고 편두통이 생기기 전날에는 내가 잠을 잘 못 잤거나 엄청난 업무를 치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 몸이 지쳤던 것이다.
마음이 힘들었던 것이다.
슬럼프를 겪는 사람에게 전문가들은 무조건 충분히 쉬라고 한다.
운동선수일 경우에는 1군 경기에 나오지 말고 2군에서 편안하게 몸을 만들라고 한다.
잘못된 것이 아니며 실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라고 다독인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지금은 쉴 때가 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월화수목금요일 동안 열심히 일을 했다면 주말에는 슬럼프가 찾아올 타이밍이다.
자신에게는 슬럼프가 오지 않는다며 자기가 무슨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이 된 것처럼 착각할 필요는 없다.
슬럼프가 올 텐데 싸워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
미리 알아서 푹 쉬는 게 상책이다.
일 중독자?
그런 사람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잘만 쉬고 있다.
쉬는 것은 죄가 아니다.
잘못도 아니다.
다가올 슬럼프를 예방하는 아주 현명한 방법이다.
조직과 공동체를 위한 효과적인 선택이다.
잘 먹고 푹 자고 그다음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일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