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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음으로써 다시 일어설 수 있다

by 박은석


1969년에 독일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히틀러의 나치에 반대하여 노르웨이로 망명을 갔던 인물이다.

그곳에서 그는 군대의 장교가 되었고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할 때는 직접 총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어 독일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가 선거에 출마했을 때 상대편 정당에서는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그의 사진을 포스터로 만들고 그 밑에 ‘저 총을 겨누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문구를 써넣기도 했다.

브란트가 독일이 아닌 노르웨이 편이었다며 그를 깎아내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브란트를 지지했고 나치 시절에 자신의 국가를 향해 총을 들어야만 했던 그의 행동에 찬사를 보냈다.

브란트가 집권했을 당시 독일은 전쟁의 참상을 극복하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켜 급격한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화로 인한 부작용들도 사회 전반에 퍼져있었다.




브란트는 집권 기간 동안 ‘사회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경제성장에 따른 양극화와 환경오염 문제, 인권과 복지 정책, 나치 유물 청산과 같은 골치 아픈 문제들이 조금씩 해결되었다.

오늘날 독일이 복지국가가 되고 국제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브란트의 사회적 정의가 실효성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경제력만으로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몸소 보여준 대표적인 모습이 있다.

1970년 12월 7일에 브란트는 이웃나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있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영웅 기념물’을 방문하여 헌화를 할 예정이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기념물 앞에 다가간 그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행동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빌리 브란트2.jpg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자 바르샤바의 시민들과 게토의 유대인들이 힘을 모아 1943년 4월 19일부터 5월 16일 사이에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폴란드에서 나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첫 번째 봉기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유대인과 폴란드인 1만 3천 명 이상이 숨졌으며 3만 6천 명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에 폴란드 정부는 저항의 현장인 바르샤바에 ‘게토 영웅 기념물’을 세웠다.

그런데 그곳에서 독일의 총리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브란트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원래 무릎을 꿇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서 보니 어떤 힘이 자신을 내리눌러서 무릎 꿇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브란트에게 찬사를 보내지는 않았다.

독일의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그 행동을 비난하며 브란트에게 격렬히 반발하였다.




무릎 한 번 꿇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무릎을 세우고 현란한 말과 해괴망측한 논리로 변명을 늘어놓는 편을 택한다.

사실 브란트는 잘못이 없다.

그는 나치에 저항했고 목숨 걸고 나치와 싸웠던 사람이니까 그 자리에서 “나도 이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합니다.”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였다.

일개 개인이 아니라 독일 총리라는 사실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독일은 반드시 바르샤바 게토 봉기 영웅들에게 사죄를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속한 사회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며 사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브란트의 신념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바라던 사회적 정의를 세우는 길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사람들은 ‘브란트가 무릎을 꿇음으로써 독일이 일어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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