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신기하게도 오늘은 맞아떨어진다.
벌써 두 시간 넘게 함박눈이 쏟아진다.
쏟아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밤이다.
처음에는 아직 땅의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는지 눈들이 땅에 닿자마자 눈물로 변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포근히 한 겹 두 겹 땅을 덮고 있다.
하얀 눈은 무의식으로 밀어 넣었던 기억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마력을 가진 것 같다.
괜히 눈 내리는 밤이면 어린 날의 눈놀이들이 떠오르고 첫사랑이 생각나고 청춘의 사랑과 이별이 기억난다.
그리고 저절로 “슬퍼하지 마세요. 하얀 첫눈이 온다고요.”라는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1986년 12월에 열린 대학가요제에서 이정석이라는 대학생이 나왔다.
평범한 옷차림의 평범한 외모였다.
그 흔한 기타도 들지 않고 딸랑 마이크 하나 잡고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 노래에 전국의 청춘들이 빨려들었다.
그는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렸다.
‘첫눈’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이 “첫눈이 오면...”하고 약속을 했는지 모른다.
첫 비가 오면, 첫 꽃이 피면, 같은 표현은 쓰지를 않는다.
그런데 눈은 다르다.
눈이 내리면 세상의 색깔이 달라진다.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인데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동화 속 마법나라에 온 듯한 환상을 본다.
하늘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고, 선녀님들이 바구니에서 눈송이를 뿌려주는 것 같다.
그 눈을 맞는 날에는 뭔가 큰 행운이 일어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하얀 눈, 그것도 아무도 맞아보지 못한 첫눈이라면 정말 큰 선물일 것 같아서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들이 잘 지켜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굳이 첫눈이 아니어도 만날 수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약속들이 흥분과 희망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준 것은 확실하다.
눈 내리는 밤에 백석은 사랑하는 나타샤를 생각했고 김종길은 눈을 헤치고 빠알간 산수유 열매를 따 오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눈 오는 날 화롯불에 둘러앉아 알밤을 구워 먹으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들을 들었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이렇게 컸다는 옛이야기들을 들었다.
그 행복한 기분에 들떠서 눈 오는 하늘을 쳐다보며 내 눈에 저 눈을 담고 오곤 하였다.
그러던 눈이 애물단지처럼 여겨지는 것은 내 안에 마력이 다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자동차의 시동을 켜야만 했던 운전병 시절 때부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눈놀이들을 하지 못하고 대신 눈이 오면 빗자루를 들고 나가서 쌓이는 눈들을 길 밖으로 밀어내야만 했다.
그때부터 눈은 내리는 족족 치워 없애야 하는 겨울날의 주적이 되었다.
아예 내리는 즉시 녹여버리려고 염화칼슘을 잔뜩 뿌려놓기까지 했다.
눈 때문에 길이 막혔다느니, 눈 때문에 넘어져서 다쳤다느니, 눈 때문에 수도관이 터지고 세탁기를 돌릴 수 없다는 말들만 넘쳐난다.
하늘을 향해 제발 좀 그만 내리라고 잔뜩 인상을 쓴다.
관공서에서는 전화통이 북새통이 될까 봐서 서둘러 제설차량을 불러 동네를 휩쓸고 지나가게 한다.
길은 깔끔해지고 눈은 한켠으로 밀려나 구질구질한 흉물이 되어 버린다.
눈이 보기 싫다며 치워버리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 편을 갈라 눈싸움을 벌이고, 동글동글 눈사람을 만들고, 비료 포대를 들고 언덕에서 썰매를 탔던 아이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깔깔거리며 웃어대던 그 높은음자리의 소리들도 들리지 않는다.
혹시 내가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어낼 때 아이들도 쓸려간 게 아닐까?
눈은 누구의 마음을 들어주어야 할지 오락가락할 것이다.
그래서 겨울이라고 해서 매일 내려오지는 않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내려오는 것 같다.
++<1986년 대학가요제 대상 이정석 하얀 첫눈이 온다고요>
https://youtu.be/1dp3uxXit6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