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Mar 27. 2021

반숙 계란을 먹다 적당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계란을 삶을 때는 항상 완숙이었다.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배웠다.

끓는 물에 생계란을 넣고 12분 이상 계속 끓이면 완숙이 된다.

반숙은 10분 정도 넣었다가 꺼내라고 했다.

남들은 일부러 반숙을 해서 먹기도 하던데 나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기왕이면 입이 텁텁할 정도의 완숙이 좋았다.

반숙은 왠지 물컹한 느낌이 싫었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 반숙으로 삶은 달걀을 먹게 되었다.

집에 있으니까 먹은 것이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느낌과 달랐다.

물컹하면서 입속으로 쪽 빨려 들어가다시피 하는 반숙 달걀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입이 턱 막혀서 물을 찾는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다.

완숙 달걀보다 훨씬 부드럽고 싱싱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성질 급한 사람이 반숙을 먹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완숙과 반숙의 그 미묘한 맛의 차이를 잘 아는 사람이 반숙을 먹는 것이었다.




잘 익어야만 맛이 제대로 나는 줄 알았다.

익기 전에는 젓가락을 들이밀지 말라고 했다.

익기 전에는 과일을 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덜 익었을 때 먹는 맛이 있다.

라면도 꼬들꼬들한 기운이 남아 있을 때 한 젓가락 호로록 먹을 때가 감칠맛이 난다.

아직 푸르른 빛이 남아 있는 풋사과의 그 시큼한 맛에는 중독성이 있다.

벌써 ‘풋사과’라는 단어만 보아도 입에서 군침이 돈다.

삼겹살을 구울 때도 아직 덜 구워졌는데 냉큼 집어 먹는다.

누리끼리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만 기다리는 마음보다 손이 먼저 움직인다.


오죽했으면 덜 익었을 때 먹으면 배탈이 난다는 말로 엄포를 주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로 배앓이를 한 적은 없다.

오히려 덜 익었을 때 먹는 것이 더 맛있었다.

어쩌면 음식의 맛보다도 그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들보다 ‘먼저’ 먹는 것이고, ‘처음’을 먹는 것이고, ‘아직’을 먹는 것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먹는 기준이 정해진 것은 없다.

쌀을 씻어서 손등만큼 올라오게 물을 붓고 불에 끓여서 거품이 다 빠지면 피식피식 뜸을 들였다가 먹으라는 법칙이 있었던 게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도 먹고 저렇게도 먹다 보니까 그런 방법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배가 고플 때는 물에 불릴 시간도 없고 뜸을 들일 시간도 없다.

생쌀을 먹기만 해도 맛이 있다.


그런데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완전히 익히라고만 한다.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고 야단이다.

사람이 완전하지 않은데 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완전해야 한다고 하니 어디 그게 가능한가?

또 그 완전하다는 기준도 모호하다.

내 입맛에 완전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남은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는데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면서도 일을 왜 그렇게 했냐고 야단친다면 정말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적당히 넘어가는 구석이 없어서 바늘 꽂을 구멍도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 곁에는 가기도 싫다.

분명 그런 사람은 남들에게는 엄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일 확률이 99.99%일 것이다.

0.01% 확률이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군자가 가끔 나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를 대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부인이 악녀가 되었을까 짐작이 된다.


사람이 적당히 넘어가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일도 적당히 해야 한다.

과로하면 쓰러진다.

인간관계도 적당히 해야 한다.

너무 열어두어서도 안 되고 너무 닫아버려도 안 된다.

인생도 적당히 누리기도 하고 쉬기도 하며 살아야 한다.

일평생 여행 한 번 못 가봤다는 사람을 볼 때면 너무 안쓰럽다.

쉴 틈이 없다고 그 시간이면 나가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사람에게 반숙짜리 계란을 주고 싶다.

이거 먹으면서 좀 쉬라고 적당히 하라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