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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pr 13. 2021

상처가 나를 크게 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산책하다가 벚꽃 휘날리는 나무 아래에 잠시 머물렀었는데 엊그제 내린 비에 그 화사했던 벚꽃이 다 떨어졌다.

이제 초록색 이파리가 더 짙어질 테고 까만 버찌가 맺힐 순서이다.

그러면 조심해야 한다.

괜히 벚나무 밑에 서 있다가는 떨어지는 버찌에 낭패를 당할 수 있다.

그늘 좋다고 그 아래 주차했다가는 새들의 배설물 폭탄을 받을 수도 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찐득찐득한 수액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 벚나무를 껴안고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조차도 이제는 벚나무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한다.

벚나무 줄기가 너무 흉하기 때문이다.

쩍쩍 갈라진 줄기마다 진물이 흐르고 개미를 비롯한 온갖 벌레가 기어 다닌다.

다른 나무들은 말끔한데 유독 벚나무가 심하다.

화려한 벚꽃에 따라오는 달콤함이 많아서 그런지 곤충들과 새들이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다며 달려드나 보다.




여름에 녹음이 우거질 때는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보기는 좋다.

그런데 그때는 또 사방의 매미들이 몰려들어서 벚나무를 괴롭힌다.

그때도 벚나무로부터 빨아먹을 게 많은지 여기저기 빨대를 꽂아놓는다.

나는 모기 한 마리만 물어도 참지를 못한다.

온 집안을 들쑤셔서 그놈의 모기 한 마리를 기어코 찾아서 처참하게 응징해버리고 만다.

그러니 온몸을 각종 곤충과 새들과 매미들이 쪼아대도 태연한 척 가만히 서 있는 벚나무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게 남들을 먹여 살리느라 자신의 진액을 다 뽑아내버린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바로 벚나무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 주고 나면 벚나무는 흉측하리만치 온통 상처투성이다.

그 상처를 껴안고 겨울을 보낸 후 다시 봄에 꽃을 피운다.

1년 365일 중에서 열흘 정도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아름다운데 꽃이 떨어지면 350일 넘게 생고생을 한다.

그게 벚나무다.




안쓰럽기는 한데 사람도 벚나무를 닮았다.

인생의 봄에 꽃 피우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많은 이들이 몰려와 재잘거리며 즐거운 웃음꽃을 피운다.

하지만 언제나 그 곁에 있을 수만은 없기에 한 사람씩 떠나간다.

사람이 왔다가 갈 때마다 생채기가 하나씩 남는다.


누구는 줄기에 금을 긋고 가고, 누구는 이파리를 따서 가고, 누구는 꽃향기만 맡고 가고, 누구는 열매를 훔쳐간다.

그리고 누군가는 깊숙한 곳에서 진액을 뽑아간다.

좋아서 주기도 하고 미워서 주기도 한다.

안 주고 싶은데 빼앗기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내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 줄 한 줄 상처가 생긴다.

몸에도 상처가 나고 마음에도 상처가 난다.

살짝 긁힌 상처도 있고 깊게 패인 상처도 있다.

그 상처를 싸매고 아물기를 기다리며 한 해를 보낸다.

‘내년에는 좋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면서 말이다.

그렇게 ‘내년에는’, ‘내년에는’ 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작년에 봤던 벚나무를 올해 다시 보니 키가 더 자랐고 꽃도 더 많이 폈다.

가지도 더 넓게 퍼졌다.

먹잇감이 더 커졌으니 더 많은 벌레들과 곤충들과 새들과 매미들이 몰려올 것이다.

작년에도 그렇게나 고생을 했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더할 것 같다.

편안하게 지나가는 해가 한 해도 없다.

기껏 겨울을 지내면서 상처 난 곳들을 고쳐놨는데 며칠 봄이 지나가기도 전에 벌써 여기저기 상처가 생겼다.

저 벚나무가 내 친구라도 된다면 한심한 녀석이라고 야단이라도 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저렇게 많은 상처를 입었으면 벌써 쓰러졌어야 할 것 같은데 벚나무는 더 커지고 더 굵어졌다.

상처가 영양분인가?

그렇구나! 벚나무는 상처를 먹으면서 크는 것이었다.

상처가 깊은 만큼 그 상처를 싸매느라 더 굵어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상처를 먹으면서 컸고 상처를 싸매면서 강해졌다.

상처가 나를 크게 했다.

그걸 몰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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