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Apr 17. 2021

사랑의 기술에 얽힌 이야기


아마 스무 살 때였을 것이다.

달달하게 연애감정이 솟구칠 때였다.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며 누가 소개해 주었다.

일단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사랑의 기술>.

이 책을 읽으면 여자를 휘어잡을 기술이 생길 것만 같았다.

돈 주앙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기술은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몇 페이지를 넘겨보았지만 작업에 쓸 수 있는 기술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기말고사 시험 준비하는 것 같은 내용만 잔뜩 이어지고 있었다.


저자의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리히 프롬.

발음하기도 편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사랑이란 둘이 앉아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사랑이란 솜사탕을 나눠 먹는 것.’

뭐 이런 말이 나와야 하는데 이 책은 고상하고 어려운 말만 들었다 놨다 했다.

현대인은 사랑을 상실했다나 뭐라나.

머리만 아플 것 같아서 방구석에 책을 던져버렸다.

그땐 정말 그랬다.




그 책을 20년이 지난 후에 읽었다.

스무 살 때 못한 숙제를 마흔 살 때 마무리지은 것이다.

제때제때 해야 하는데 미루다 미루다 뒤늦게 한 격이다.

던져버릴 책이 아니었다.

너무 좋은 책이고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고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5가지의 속성이 있다고 했다.

서양 사람들은 무슨 개념을 만들고 정의를 내리고 첫째, 둘째, 셋째로 정리하는 일을 참 잘한다.


그가 정리한 사랑의 5가지 속성은 첫째로 상대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둘째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셋째로 상대방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넷째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상대방에게 먼저 주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타이틀만 살펴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이 다섯 가지 사랑의 속성을 내가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볼까 하다가 재빨리 그만뒀다.

그만두기를 잘했다.




에리히 프롬의 주장대로라면 사랑에는 굉장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흔히 경상도 남자들처럼 “밥 도!”, “아는?”, “자자!”의 세 마디 말밖에 안 하면서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야단맞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꼭 말을 하고 표현해야 하나?

눈빛만 봐도 다 아는데...” 같은 말은 통하지도 않는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젊은 배우처럼 오글오글 거리는 대화는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

닭살 돋는 표현을 해 줘야 사랑한다는 축에 끼워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사랑의 속성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아직 한참이나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조금 기분이 상해지려고 해서 그럼 저자는 사랑을 잘했나 싶어서 에리히 프롬의 연애사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봤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복잡했다.

도대체 몇 명을 사귄 거야?

승리감에 도취되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마음이 짠했다.




첫사랑이었던 약혼녀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뺏겼다.

분노가 폭발했을 것 같다.

그 후에 열한 살 연상의 정신과 의사와 결혼했지만 3년 만에 헤어졌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망명해서 15살 연상의 여인과 깊은 연애를 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그 후에 동갑내기 사진작가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불치의 병으로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을 만났다.

무려 3명의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여성이었다.

동병상련이었을까?

그제서야 에리히 프롬은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찰하여 <사랑의 기술>이란 책을 내게 된 것이었다.


사랑의 기술은 연애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을 이야기하고 문명을 이야기하고 인간관계를 말하는 책이다.

하지만 그 안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이 다 들어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위대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