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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y 01. 2021

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생각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빗소리에 자다 깨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다른 때 같으면 짜증날만도 한데 비 오는 날에는 잠을 설치는 것도 괜찮다.

반가운 ‘비님’이 아닌가?


비 오는 날이면 괜스레 기분이 좋다.

마음이 착 가라앉아서 여유가 있다.

한껏 게으름을 피워도 누가 뭐라고 안 그럴 것 같다.

바쁘게 싸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비가 모든 것을 허용해 준다.

하긴 인류 역사 속에서 비 오는 날엔 하늘이 푹 쉬라고 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밖에 나가 사냥을 할 수도 없고 밭일을 할 수도 없었으니 비 오는 날에는 그저 집 안에서 식구들과 알콩달콩 밀린 얘기나 하며 지냈다.


비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부침개를 부치셨고 케케묵은 이부자리 꺼내서 이불잇, 베갯잇을 갈아 붙이셨다.

비 오는 밤이면 나는 창문을 열어놓고 라디오 소리를 빗소리에 버무려 맥심 커피 한 잔 홀짝였다.

비 오는 날의 낭만이라고 한껏 센티멘털함을 즐겼다.




양귀자는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때문에 나도 비 오는 날에 가리봉동을 찾아가볼까 맘먹기도 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곳을 찾아가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을 것 같다.


비 오는 날이면 거울 속 내 모습이 조금 더 초췌해 보인다.

하늘이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이발할 때를 맞춰서 비를 내려주신다.

비 오는 날의 이발소와 동시에 푸시킨이 떠오른다.

시골 이발소 깎새 삼촌이 러시아 시인 푸시킨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발소 벽에 커다란 액자를 걸어두셨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시라고는 동시밖에 몰랐던 때 나에게 ‘이런 게 시다!’라며 다가온 글이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맞닥뜨린 시이다.

시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나에게 시 한 수 알려주기도 전에 나는 자연스럽게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그냥 푸시킨이 떠오른다.




비 오는 날은 어둡고 칙칙하다.

이런 날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가끔 아주 가끔 비가 오고 대부분의 날에는 맑은 하늘을 보기 원한다.

비 오는 날은 가끔씩 밟는 브레이크 페달 같기를 원한다.

사실 비 오는 날은 가끔이다.

그런데 그 가끔이 자주인 것처럼 여겨진다.

내가 원할 때 비가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이 정도에서 비가 왔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비는 내 생각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꼭 비에게 속은 것만 같다.


우산도 없는데 퇴근길에 비가 쏟아지면 하늘을 원망하며 눈을 가늘게 떠서 째려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는 사정없이 내린다.

비가 그치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비를 홀딱 맞아보는 것도 좋다.

처음 몇 방울이 옷 속으로 스며들어 차가운 감촉으로 피부에 닿을 때면 움찔한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비에 젖어들면 비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비를 흠뻑 맞아본 사람은 안다.

비를 맞으며 운동장에서 공을 찼던 아이들도 안다.

비에 젖으면 젖을수록 기분은 더욱 좋아진다.

비 맞으면 안 좋다는 말은 정답이 아니다.

좋을 수도 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는 모르지만 비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도 있다.


비는 사랑을 불러오기도 한다.

사랑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궁금하다면 <Singing in the Rain>이란 영화를 보라!

사랑은 비를 타고 내려온다.

우산을 들고 비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라!

그러면 어딘가에서 나에게로 오는 사랑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비 오는 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문을 열고 성큼성큼 다가올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비 오는 날에 내 마음을 화창하고 맑게 만들어줄 그런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 인생을 바꿔놓을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비 오는 날 바닷가 카페에 등장한 그리스인 조르바>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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