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 사람이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이 보여주는 것만 보면서 그 사람을 판단한다.
보여주는 것은 빙산의 일각처럼 극히 적다.
어떤 때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어떤 때는 저런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의아해한다.
그러면서 사람이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 사람이 맞다.
이전에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기껏 눈에 들어와서 적응이 되었는데 만화경을 살짝 돌리면 또 새로운 모양이 펼쳐지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어떤 모습이 그 사람의 진면목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모습이 그의 진면목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꽃나무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을 피우는 꽃이 있다.
란타나(Lantana)라고 하는 꽃인데 일단 한 번 꽃이 피기 시작하면 흰색, 오렌지색, 노란색, 분홍색, 붉은색 꽃잎들이 돌아가면서 피고 진다.
하도 여러 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꽃 이름을 ‘칠변화(七變花)’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색깔이 너무 아름다우니까 좋은 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란타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강한 독성을 지닌 꽃이기도 하다.
새까만 그 열매를 먹으면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독성을 지닌 꽃이니까 나쁜 꽃인가?
그렇지도 않다.
그 잎사귀에는 해독성 물질이 들어 있어서 기관지 질환이나 눈병에 좋고 해열제로도 사용된다.
아!
그러면 란타나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그런 꽃이구나!
맞다.
그런 꽃이다.
좋게 보면 좋은 꽃이 되고 안 좋게 보면 나쁜 꽃이 된다.
보기 나름이다.
란타나의 진면목은 과연 어떤 색깔의 꽃을 피울 때일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한 가지 색의 꽃이 갓 피어날 때나, 여러 색깔의 꽃이 한꺼번에 드러날 때나, 모든 꽃이 다 떨어져 있을 때나 란타나는 란타나다.
란타나 입장에서는 한 번, 두 번, 세 번, 꽃의 색깔을 바꿔가면서 자신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란타나는 좋게 보면 정말 좋은 꽃이다.
피고 지는 다양한 꽃잎들이 보기 좋고, 해독성이 있어서 몸을 살려주니 좋다.
그런데 란타나를 안 좋게 보면 안 좋은 꽃 같다.
이 색 저 색 변화가 심하니 지조를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 좋고, 독성이 강해서 사람을 해치니 안 좋다.
열매를 만들어내면 뭘 하나?
먹을 수도 없는 열매이다.
아이들이 가까이 가려면 말려야 한다.
열매를 만지기라도 하면 빨리 가서 손 씻고 오라고 야단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란타나는 보기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그런 꽃이다.
애초에 사람은 선하게 태어난다느니 악하게 태어난다느니 말들을 하지만 그런 말은 고지식한 철학자들이나 하라고 하자.
내가 보기에 사람은 다 좋은 모습으로 태어난다.
갓난아기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보는 우리가 그냥 기분이 좋다.
좋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던 아기가 갑자기 미워질 때가 있다.
아기가 미운 짓을 해서 미운 게 아니라 보는 우리가 밉게 보기 때문에 밉게 보이는 것이다.
자기가 빨간색 꽃을 좋아한다며 란타나에게서도 빨간색 꽃만 피우기를 바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오늘은 이 모습 이 색깔을 좋게 보고, 내일은 저 모습 저 색깔을 좋게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안 좋게 보지 말고, 그 사람에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며 좋게 보면 어떨까?
좋게 보면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이고 안 좋게 보면 모든 것이 다 안 좋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