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by 박은석


가을이 오면 보고 싶은 풍경이 있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들녘을 보고 싶습니다.

그 옆으로 빨간색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녀가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코스모스가 끝나는 지점에는 노랗게 물들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 있는 마을이 나옵니다.

바람이 한 번 불어올 때마다 은행나뭇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그 아래에 서보고 싶습니다.

김용택 선생이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그 여자네 집>도 아마 그 옆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도 김용택 선생처럼 그 여자네 집을 빼꼼히 들여다보다가 덜컥 겁이 나서 도망치듯 골목길을 달리고 싶습니다.

골목 끝 마지막 집에는 담벼락을 따라 고개를 내민 감나무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지 끝에 달린 노란 홍시가 방긋이 웃으면서 ‘나를 따서 잡수시오!’ 하겠지요.

그 잘 익은 놈 하나 입 안에 넣으면 세상이 참 달콤해질 것입니다.

가을이 오면 그런 가을 풍경이 보고 싶습니다.




가을이 오면 맡고 싶은 냄새가 있습니다.

추수가 끝난 논밭에서 볏단을 태우는 그 구수한 냄새를 맡고 싶습니다.

이삭 한 줄기 뽑아들고 빨간 불에 살짝 집어넣었다 빼서 두 손으로 비비면 갓 구운 햅쌀 간식이 됩니다.

그놈을 오도독 씹으면 입 안 가득히 구운 쌀 냄새가 퍼져갈 것입니다.

얼굴은 시커멓게 숯검댕이가 되어도 속은 하얀 쌀로 가득할 것입니다.

해가 지면 달빛 아래 모닥불을 피우고 감자와 고구마를 던졌다가 꺼내 먹고 싶습니다.

던져놓은 감자와 고구마가 잘 익었는지는 냄새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설익은 것과 잘 익은 것은 냄새가 다릅니다.

감자와 고구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자기만의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냄새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며 <향수>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럼 나는 어떤 향기를 풍기는지 궁금합니다.

가을이 오면 나는 그렇게 가을 냄새를 맡고 싶습니다.




가을이 오면 듣고 싶은 소리가 있습니다.

달밤에 찌르르 찌르르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 소리에 보조를 맞춰서 하모니카를 꺼내 불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릴 적 동요들이 마구마구 생각이 날 것입니다.

말을 타고 서울에 간 오빠도 생각나고 푸른 하늘 은하수도 떠오를 것입니다.

동네 친구들과 시끌벅적 떠들며 놀던 소리와 밥 먹으라고 외쳐대는 어머니의 소리도 들릴 것입니다.

소리들을 따라 한 발짝씩 안으로 들어가면 정겨운 추억들이 하나씩 떠오를 것입니다.

그 길들을 걸어가다 보면 바스락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낙엽을 밟을 때는 깃을 바짝 세운 롱코트를 입어야 제격입니다.

두 손은 주머니에 꼭 찔러 넣고 천천히 걸으면 더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폼이 나고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가을이 오면 나는 그런 가을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가을이 오면 나는 하고 싶은 기도가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잘 계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올해까지는 어떻게든 꾸려왔지만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나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어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들었다면 도와주실 거란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안 계시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허공에다가 외치는 말이라고 해도 내 속에 있는 말을 밖으로 터뜨리는 것은 나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김현승 선생도 <가을의 기도>에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역시 가을은 기도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가을이 오면 나는 그런 가을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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