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젊어진다

by 박은석


나는 휴대폰 주소록에 한 번 입력하면 웬만해서는 연락처를 삭제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무려 5천 명에 달하는 사람의 이름이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다.

대한민국 인구가 얼추 5천만 명이니까 내가 1만 분의 1의 명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잠실야구장에 2만 명 관중이 입장했다면 그중에서 2명은 내가 아는 사람일 확률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언제 어디서 내 얼굴이 찍힐지 모른다.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연한 장소에서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가끔, 가끔은 있다.

그런 일이 만날 때면 마치 나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하철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난 적이 있다.

하루 24시간 동안 수많은 지하철이 동서남북으로, 땅 속으로, 혹은 땅 위로, 다리 위로 지나가는데 그중에서 딱 내가 지하철에 있는 시간에 그 장소에 내 친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도 있었다.




휴대폰 주소록을 주욱 훑어보다가 무심결에 ‘이 사람에게 전화 한 번 해볼까?’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그것부터 자신이 없지만 모험을 걸어본다.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순간 수화기 저편에서 반가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 식구들의 안부도 물어본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기억들을 소환하며 서로 즐거워한다.

그때는 젊었으니까 슈퍼맨처럼, 원더우먼처럼 열심히 일을 했고 열정적으로 살았다.

전화 통화하는 내내 그 젊은 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로를 힘들게 했던 일들도 좋은 추억거리였다며 웃어넘긴다.

전화를 끊을 때면 다음에 또 연락하자고 한다.

물론 다시 연락하려면 또 몇 년은 지나야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한 번의 통화로도 기분이 좋다.

아니, 이렇게 가끔 한 번 전화로 목소리를 확인하는 게 복잡한 관계로 끌어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좋을 수도 있다.




얼마 전에 휴대폰 액정에 메시지가 하나 찍혀 있었다.

누가 전화했나 봤더니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순간 그분이 전화를 잘못 거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튼을 잘못 눌러서 내가 전화를 받기도 전에 얼른 꺼버리신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걸려온 번호로 이번에는 내가 전화를 해 보았다.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달리는 말의 앞머리에 걸린 등잔처럼 가물가물 깜박깜박거리며 그분과의 추억들이 솟아올랐다가 가라앉곤 했다.

그분을 마지막으로 본 지는 5년 정도 되었다.

가정에 큰 일이 있었고 그 일을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가셨다.

처음 한두 해 정도는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뜸해졌고 최근에는 빙하의 아랫부분처럼 기억의 바닷속에 푹 잠겨버렸다.

그런데 그분이 내 기억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분의 기억 속에 내가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오늘은 15년 만에 만난 분이 있었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연락처를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분이 우연히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칠레의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도 <시가 내게로 왔다>에서 그런 고백을 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15년이라면 5,500일 정도 되었다는 것인데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그때는 젊디젊었고 지금은 15년이나 나이 들었는데도 그런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마치 엊그제까지 봤던 것처럼 똑같았다.

연세 많은 분들이 동창회에서 친구들에게

“너는 똑같네. 하나도 안 변했어.”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거짓말한다며 웃어넘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분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 순간이동을 한다.

그때로 돌아간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나를 젊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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