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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an 09. 2022

세월을 잡으려 하지 말고 잘 흘러가게 하자


3주일에 한 번은 이발을 한다.

이래봬도 내 머리를 손질해주는 단골 미용실이 있다.

대단히 솜씨가 좋고 유명한 미용실은 아닌데 편해서 자주 가다보니까 단골이 됐다.

내 차례가 되어서 의자에 앉으면 원장님이 한 마디를 한다.

“흰머리가 많이 늘었네요.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어요.”

한 달 전에도 들었던 말이고 두 달 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나 스스로도 거울을 보면서 느낀다.

샤워할 때면 욕조에 떨어진 내 머리카락들이 이제는 아깝게 느껴진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도 느려졌다.

전에는 보름에 한 번 머리를 깎기도 했는데 이제는 한 달까지도 견딜 수 있다.

머리카락의 굵기도 얇아졌다.

돼지털처럼 굵고 곱슬곱슬하던 것이 이제는 살짝 파머를 한 듯한 인상을 준다.

머리카락 힘이 줄어들 게 아니라 내 성질이 줄어들어야 하는데 원하는 것은 그대로이고 원치 않는 것만 변해간다.

나에게도 세월이 흘러간다는 증거이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노래를 불렀던 서유석 선생과 같은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분은 주차위원으로 오랫동안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그 걸쭉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나도 여러 번 인사를 드리며 악수를 했다.

그분의 손아귀 힘은 엄청 셌다.

당신은 살짝 잡았다고 했는데 상대방은 ‘악!’ 소리를 내기도 했다.

지금도 그분의 억센 손아귀 힘이 느껴진다.

힘도 길러야 세지는 것이니까 손아귀의 힘이 셌다는 것은 그만큼 꽉 움켜잡는 일을 많이 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처럼 볼펜이나 쥐고 수저나 쥐는 사람들에게서는 절대로 그런 센 힘이 나올 리가 없다.

그분은 어쩌다가 그렇게 손 힘을 기르게 되었을까?

아마 세월을 꽉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은 아닐까?

세월의 힘이 워낙 드세니까 흘러가는 그 세월을 잡으려면 엄청나게 힘을 길렀어야 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잡아보려고 애썼던 전라도 사람들은 허벌나게 많았고 경상도 사람들은 천지삐까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꽉 움켜잡았다 하더라도 물이 손에서 빠져나오듯이 세월은 흘러가고 말았다.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고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게 세월이다.

서유석 선생은 젊었을 때 그 사실을 이미 깨달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세월이 더디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빨리 좀 흘러가서 “너 몇 살이니?” 물어보는 어른에게 자신 있게 손가락을 쫙 펴고 싶었다.

그때는 흘러가라고 해도 흘러가지 않는 게 세월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몰랐을 뿐이지 세월은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이미 세월이라는 고속열차에 올라 타 있었다.

그 열차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 눈치채지 못하면서 내 걸음이 빠르냐 느리냐만 계산하고 있었다.




흘러간다고 해서 덧없는 것은 아니다.

강물은 흘러가서 모래톱도 만들고 너른 삼각지도 만든다.

위에 있던 것들을 아래로 옮겨준다.

모난 것들을 둥글둥글하게 깎아준다.

땅을 비옥하게 해주고 강을 생기있게 해준다.

흘러가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면서 더욱 왕성한 생명력을 얻게 한다.

세월도 마찬가지 아닐까?

흐르고 흐르면서 빳빳했던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로 흔들어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세월에 씻기고 씻겨서 내 머리카락 색은 허옇게 바래졌지만 가정이라는 모래톱도 만들고 가문이라는 삼각지도 만들 수 있었다.

세월 따라 흘러오느라 많이 닳고 작아지고 약해진 것 같지만 건장한 아들도 생겼고 예쁘장한 딸도 생겼다.

흘러가는 세월 때문에 손해 본 인생이 아니라 세월 따라 흘러가면서 얻은 것이 많은 인생이 되었다.

삶에서 정말 좋은 것은 잘 잡아놓을 것이 아니라 잘 흘러가게 놔주어야 한다.


+++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서유석 <가는 세월> https://youtu.be/-xcWQD49Z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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