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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17. 2020

그대!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체코의 전설적인 쳄발로 연주가인 주잔나 루치지코바(Zuzana Růžičková, 1927~2017)는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집안 분위기 덕택에 어렸을 때부터 독일인 가정교사를 통해 피아노를 배웠다. 장차 파리로 피아노 유학을 떠나고 싶어 했던 루치지코바는 열다섯 살이 되던 1943년 12월에 체코를 점령한 독일 나치정권에 붙잡혀 어머니와 함께 수용소로 끌려간다. 순식간에 집을 잃고 가족과 헤어지고 모든 소지품조차 빼앗겨갔지만 그녀의 손에는 얼마 전에 손으로 베껴 쓴 음악 악보가 쥐어져 있었다. 바흐의 사라방드 영국 모음곡의 한 부분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그 두려운 상황 속에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바흐의 곡을 연주하면서 두려움과 싸워나갔다.     


가축 운반용 열차에 실려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도착한 곳은 바로 아우슈비츠역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다시 화물차로 옮겨졌다. 그런데 그 순간 쥐고 있던 바흐의 악보를 놓쳐버렸다. 땅에 떨어진 악보를 주워오려고 어머니가 순식간에 화물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루치지코바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화물차 안으로 깊숙이 밀려들어갔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화물차에 탔던 유대인들은 거의 다 가스실로 끌려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매우 건강했기에 시가지를 청소하고 수용소에 갇힌 여성들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루치지코바는 체코의 테레젠 수용소에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다시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끌려다니며 계속해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단 한순간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언젠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바흐의 [사라방드]를 연주하는 생각을 했다. 비록 악보를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악보가 다 저장되어 있었다. 독일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아 그녀는 바흐 연주가로 큰 명성을 얻었다. 1972년 3월 31일 바흐의 사라방드 영국 모음곡들을 녹음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바흐의 작품을 해석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연주의 마지막 부분에서 원래의 악보인 단음계로 연주하지 않고 밝고 희망찬 분위기를 드러내도록 E장조로 편곡하여 연주하였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마치 작은 벌레처럼 서 있다. 그리고 당신을 초월하는 어떤 높은 질서도 여기에 있다. 그 질서는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며, 인간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구원해낸다.”는 루치지코바의 말을 곱씹어본다. 그녀는 나치가 자신을 벌레처럼 취급하더라도 자신을 둘러싼 또 다른 어떤 것이 있다고 믿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것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그녀가 줄곧 간직했던 희망이었을 것이다. 희망이 있다면, 인간적으로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다. 희망이라는 정신적인 힘이 우리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구원해낸다. 그대!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희망을 가지든지 가지지 않든지 상황은 똑같다. 그렇다면 나는 희망을 가지는 쪽을 택하겠다. 돈 드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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