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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남자는 말야
도울 수 있어서 좋고 도움을 받아서 좋은 세상이다
by
박은석
Jan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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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이 다 되신 어르신께서 언제 시간이 나면 당신 집에 와서 몇 가지 일을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고 어르신은 이곳에서 혼자 사신다.
간단한 일인데도 당신이 하기에는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부르기도 애매하다고 하셨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아파트 경비아저씨에게 부탁을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부탁할 수가 없다.
사람을 부르려면 출장비를 줘야 하는데 그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어서 쩔쩔매고 계셨다.
전에 우연히 그 집에 가서 못 몇 개를 박아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정말 연락하신 거였다.
시간 내서 공구세트를 들고 찾아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 여쭈었더니 베란다 수도꼭지에 호스를 끼워주고 화장실 휴지걸이를 달아주고 샤워기의 물 조절이 잘 되게 해 주고 현관에 구두칼걸이를 만들어달라고 하셨다.
한 가지인 줄 알았는데 몇 가지 일을 모았다가 연락을 하신 거였다.
쉬운 일 같지만 팔순의 어르신이 하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란다에 있는 화초에 물을 주려고 3미터짜리 호스를 구입하셨는데 수도꼭지의 구멍보다 호스의 구멍이 조금 좁았다.
호스를 잘못 구입하셨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르신께서는 이제 이런 것도 모른다며 늙으니까 자꾸 지식이 사라지는 것 같다며 속상해하셨다.
아, 내가 말을 조심했어야 했다.
호스의 구멍이 좀 좁지만 잘 하면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전자레인지에 불을 피우고 호스를 불꽃에 살짝 녹였다.
흐물흐물해지려는 순간에 재빨리 호수꼭지에 끼워 넣었다.
역시 들어갔다.
적당히 넣은 후에 호스가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다.
시험 삼아 물을 틀었다.
샤악! 물줄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왔다.
분사기를 조절하면 물줄기를 굵게 할 수도 있고 얇게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려드렸다.
다음에는 현관의 구두칼걸이다.
어르신께서 벽에 붙일 수 있는 걸이를 사 오셨는데 이번에도 잘못 사셨다.
양면 접착테이프가 있는 물건을 사셨어야 했는데 벽지에 꽂을 수 있는 물건으로 사 오셨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며 다시 사야겠다고 하려는 순간 바로 옆에 예전에 구입해서 보관하고 있던 접착식 걸이가 있었다.
꼭 필요한 순간에 눈에 띄어서 다행이었다.
그놈을 적당한 위치에 붙였더니 너무 좋다고 하셨다.
그다음에는 화장실에 휴지걸이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졌다고 하셨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위에서 내리면서 꽂게끔 되어 있는 제품이었다.
이렇게 위에서 슬라이딩하면서 내리꽂으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어르신은 그렇게 쉬웠냐며 재밌어하셨다.
그다음에는 욕실 샤워기의 물 조절이 잘 안 된다고 하셨다.
왜 그럴까 살펴보니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샤워기에 물줄기를 고정시키는 장치를 모르셔서 생긴 문제였다.
공구세트를 가지고 왔는데 드라이버 하나 써보지도 못하고 일이 끝났다.
더 도와드릴 일이 있냐고 했더니 화분받침을 바퀴가 있는 것으로 바꾸고 싶다고 하셨다.
딱 봐도 어르신이 들 수는 없는 큰 화분이었다.
졸지에 힘자랑까지 한 번 거하게 했다.
이것도 일이라고 힘 좀 쓰다 보니 이마에 땀이 맺히려고 했다.
나에게는 너무 쉬운 일인데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 있다.
그럴 때는 내가 조금 도와주면 된다.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인데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될 것이다.
돕는 데 인색하지 말고 도움을 구하는데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도움을 받으면서 살고 또 누군가를 도우면서 살아간다.
도울 수 있어서 기분 좋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기분 좋은 세상이다.
일을 다 끝낸 기념으로 어르신과 둘이서 거하게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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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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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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