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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23. 2020

역사를 생각하면 살맛이 난다

마음이 답답할 때는 역사를 생각한다. 가깝게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성장과정을 그려본다. 일제시절 아침마다 고개를 숙여야 했던 동방요배(일왕이 있는 곳을 ‘황성’이나 ‘궁성’이라 부르고 싶지 않은 자존심으로 그냥 ‘동방’이라고 표현한다.), 해방의 기쁨을 맛보며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감격, 낮에는 경찰을 피하고 밤에는 공산주의자들을 피하며 숨어 지내야 했던 시절, 배고픔을 이겨보려고 소나무껍질을 먹었다는 기막힌 이야기, 한국전쟁의 참상은 애써 침묵하셨고, 고무신 한 켤레 받고 투표하셨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녹색 새마을 모자를 쓰시고 동네를 활보하셨던 모습들이 흐릿하게 채색이 된다. 자식들 키워내시려 청춘의 꿈을 하나씩 포기하신 ‘아버지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생각해 본다.


내 삶이 보잘 것 없어 보일 때도 역사를 생각한다. 그럴 때는 좀 더 먼 옛날 조상들의 삶을 그려본다.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들을 보면서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하는 식이다.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에 전래되었으니까 고춧가루를 버무린 이 맛있는 김치를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모내기도 조선 후기에 와서야 시행되었으니 그 이전의 쌀 수확량은 형편없었다. 그러니 어지간한 집안에서는 쌀밥을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내륙 깊숙한 곳에서는 생선을 보기 힘들어서 소금에 실컷 절인 간고등어나 가끔 구경할 정도였다. 딸기, 포도, 바나나 등 대부분의 과일과 야채도, 커피와 과자도 우리 조상들의 밥상에는 없었다. 이런 것은 세종대왕님도 못 드셨을 것이라 생각하면 내 소소한 삶도 괜찮은 것 같아 괜스레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도 역사를 생각한다. 까닭 없이 고난이 밀려올 때, 미워죽을 것 같은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도 역사를 생각한다. 두 번씩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태종 이방원 앞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런데 그런 무서운 사람이 세종대왕의 아버지다. 이방원이 없었다면 세종대왕도 없었다. 세종대왕의 다섯 번째 아들은 밥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려서 며칠 동안 끙끙 앓다가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채 굶어 죽었다. 왕자라고 해서 다 편안한 것은 아니며 왕이라고 해서 눈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찍 부모와 조부모를 다 잃고 구중궁궐에 홀로 남은 단종을 생각하면 왜 나에게만 이런 아픔을 주시는 거냐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날릴 수가 없어진다.


이미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꼰대짓도 아니고 고리타분한 일도 아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도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전에 이미 다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면,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쁨과 슬픔의 시간이나 환희와 고통의 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서 저 멀리로 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혈관을 따라 내 몸을 돌고 도는 것이다. 한 바퀴 돌고 심장에서 다시 힘을 받아 또 한 바퀴 돌면서 내 가슴을 뛰게 하고 온 몸 구석구석에 생명력을 전해준다. 역사를 생각하면 살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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