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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r 01. 2022

대한독립 만세에서 대한민국 만세로


삼일절과 광복절이 되면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선조들은 마음이었을까?

내가 만약 그 시대에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물론 군중의 함성에 휩쓸려 나도 “만세”를 외쳤을 것이다.

1919년 3월 1일에도 만세를 외쳤을 테고 1945년 8월 15일에도 만세를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만세를 외치는 마음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기미년의 만세는 죽음을 각오하는 울분의 만세였을 것이고 1945년의 만세는 뼛속 깊은 데서부터 터져 나오는 환희의 만세였을 것이다.

이 두 번의 만세와 만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을까?

‘만세’ 한 번 외친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두 글자로 된 말 한마디였을 뿐인데 일제는 그 말에 큰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만세’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삼일운동은 만세운동이라고 할 만큼 만세 소리로 대표되었다.

삼월 일일 낮 열두 시 파고다공원을 시작으로 하여 동심원을 그리듯이 퍼져나간 만세운동은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이어졌다.

함경도, 평안도에까지 다다른 만세 소리는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로 전해졌고 현해탄을 지나 일본에서도 울려 퍼졌으며, 태평양을 넘어 미국에도 전해졌다.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을 보면 만세운동의 물결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오일장에서도, 결혼식장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명절에도,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누군가 선창을 했고 모인 사람들은 후창을 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힘으로 우리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입을 막았다고 해서 소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급기야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을 비롯한 문화 전체를 바꾸려고 문화통치를 시행하였다.




지독한 놈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쌀을 빼앗고 나무를 빼앗고 산과 하천을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우리의 말과 글도 이름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의례준칙>이란 것을 만들어서 우리의 명절도 빼앗았고 장례식 때 입는 상복까지도 빼앗았다.

장례식을 삼일장으로 치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출상(발인)하는 시간조차도 아침 일찍 하라고 할 정도였다.

우리는 일제가 무서웠다고 하지만 정작 무서움을 느낀 것은 일제 자신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이 무서웠다.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때도 무서워했고 지금도 무서워한다.

만세 소리에 겁을 먹었기에 폭력을 휘둘렀고 한국인의 눈빛이 무서웠기에 서대문형무소를 높고 크게 지었던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으면 무서움도 없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하게 만세를 외칠 수 있었다.




열아홉 유관순, 서른다섯 나석주, 서른둘 이봉창, 스물다섯 윤봉길.

그들의 생은 짧았지만 그들이 부르짖었던 만세 소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한사람들의 핏줄에 쩌렁쩌렁 메아리치고 있다.

스물아홉 윤동주의 하늘을 우러러보는 삶은 무척 짧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는 그의 외침은 대한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고 있다.

1919년의 만세와 1945년의 만세 사이에서 살았던 분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분들이 하늘에 계시다면 내려다보면서 흐뭇해하실 것이다.

그분들이 땅에 계시다면 올려다보면서 편안해하실 것이다.

그분들이 목숨을 걸고 시작한 만세운동을 이제는 우리가 이어가고 있다.

선조들이 외쳤던 ‘대한독립’은 이미 이루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만세’는 계속 진행형이다.

언젠가 백두에서 한라까지 “대한민국 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칠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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