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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r 27. 2022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충분히 증명된다


고등학생 때였나 그랬을 것이다.

그때 과목이 도덕인지 윤리인지는 가물가물한데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고 그 이유는 자아실현을 위해서 나아가는 단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 자아실현을 한다는 것이다.

자아실현이란 말도 분명히 와닿지는 않았는데 어쨌거나 좀 높은 경지의 좀 더 원숙한 상태라는 감은 왔다.

그렇게 자아실현을 하면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사람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 이바지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그렇게 뱅뱅 돌려서 가르쳤다.

쉽게 말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훌륭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훌륭한 사람이란 열심히 공부해서 입신양명하고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고 이웃과 사회에 덕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야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가치가 있다고 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고 사회의 한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보니 ‘내가 과연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인가?’하는 고민이 생겼다.

자아실현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해결되었지만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들이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이 사회에 내가 꼭 필요한가?’라는 존재가치에 대한 질문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다 있을 것 같다.

한때는 내가 없으면 세상이 멈춰버릴 것이라는 자부심을 안고 살았다.

완전 착각이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장례식장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수많은 근조 화환을 받고 떠나는 분들이 있다.

대단한 직위에서 지내셨던 분들이기에 그분이 없으면 그 회사나 조직은 어떻게 될까 염려가 된다.

그런데 그런 것은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금세 다른 사람이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 처리를 한다.

떠난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겠다.




인류가 이 지상에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었을 때는 각자 할 일이 있었을 것이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 같이 하는 일도 있었고 역할 분담을 해야 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가정을 일구고서는 남편은 밖에 나가서 먹거리를 구해와야 했고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둘이 약속을 해서 당신은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고 상대방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에는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그 사회가 무너질 수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고유한 역할이 있었다.

그런데 점점 사람이 많아지면서 일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이 생겼다.

다양한 기계들이 발명되고 공장이 세워지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할 일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기계가 대신해주니까 말이다.    



 

잘살아보려고 이러저러한 도구들을 만들었고 그것들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에 비례해서 사람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제는 나 한 사람 힘을 보태지 않아도 내가 속한 사회는 틀에 맞춘 듯 잘 유지되고 돌아간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독재자 스탈린이 소련을 지배할 때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 5명을 잡으려고 100명의 시민을 죽였다면 괜찮은 수확이라고 했다고 한다.

사람을 잉여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일할 사람은 많으니까 그까짓 100명은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사람은 일하는 존재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일이 사람의 존재 목적은 아니다.

일이 사람의 존재 의미도 아니다.

사람은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서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살아 있음’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충분히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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