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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pr 24. 2022

일상을 회복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 방역지침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가 거의 다 풀렸다.

눈치를 보며 식당에 드나들었던 때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식당마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분위기 좋은 카페나 나들이 장소에도 사람들의 물결이 출렁인다.

오랜만에 실컷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흥분이 봄바람과 함께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드는 것 같다.

아직은 좀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염려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나처럼 코로나바이러스를 용케 피해온 사람들은 여전히 어디를 나가는 것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다.

차 안에도 가방 속에도 여분의 마스크를 꼭꼭 챙겨놓고 있다.

물론 이런 모습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다.

너나없이 마스크를 벗고 맨얼굴로 나다닐 날이 곧 올 것 같다.

누가 우리에게 고삐를 꽉 틀어쥐면 우리는 그 힘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지만 그 고삐가 한번 풀리면 우리는 더 이상 고삐에 구속당하지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2020년 2월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았을 때, 설날 연휴가 되었다며 명절 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코로나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리고 삽시간에 온 세상을 마비시켜 버렸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이게 뭔지 알지도 못했다.

알지 못했으니 대처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맨몸으로 바이러스와 맞설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자주 손을 씻어야 하는지, 얼마나 두터운 방호복을 입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바이러스는 인류의 죄를 심판하겠다는 신의 메시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 만들어낸 바이러스라는 말도 있었다.

전 세계는 중국을 야단쳤고 중국은 미국 때문이라고 우겼다.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가파르게 상승했고 이러다가는 1차 세계대전의 4년 동안에 희생된 사람들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희생자가 더 많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스페인독감이 소환되었고 중세의 페스트 시대도 회자되었다.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팬데믹을 통해 인류 문명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기로는 대재앙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인류의 미래가 화려한 장밋빛이 될 것이라는 낙관론자들보다 우리의 앞날은 회색빛 음울한 분위기가 될 것이라는 비관론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보다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북극성 별 하나만 보이면 길을 잃지 않듯이 팬데믹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자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조금은 찾은 것 같다.

하기는 신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이유는 죽으라고 보낸 게 아니다.

물론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냈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를 보면 갑자기 프랑스의 휴양지인 오랑시에 전염병이 발생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도시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했고 사회 관계망은 파괴되었다.

사람들은 죽음의 도시가 된 오랑시를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페스트가 사라져 버렸다.

다시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긴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잃어버렸던 일상생활을 되찾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살아갈 것이었다.

하지만 까뮈는 잊지 말라고 한다.

그 지옥 같았던 때에 오랑시를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의료진들을, 자원봉사자들을,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애썼던 사람들과 바른 정보를 알려주려고 뛰어다녔던 사람들을 말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일상을 찾게 되었다.

일상을 회복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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