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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24. 2020

자화상(自畵像)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자화상(自畵像)이라고 한다. 글 쓰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쓴 시도 자화상이라고 한다. 자화상이라는 그림을 통해서 화가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고, 자화상이라는 시를 통해서 시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웬만한 미술가들은 다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고흐의 [자화상] 중 머리를 붕대로 감싼 그림이다.


사진처럼 완벽하게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데 귀 때문에 그림을 자꾸 망쳐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살아가기 힘든 자신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비참한 모습한 모습을 연출하여 그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부터 사람들이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지 그 말들을 듣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렇게 했던 것일까?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오른쪽 귀를 스스로 잘라버리고 그 처참한 몰골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그 섬뜩함 때문에 함께 지냈던 고갱도 떠나가고 고흐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고흐처럼 나의 고집과 욕심 때문에 나의 모습이 더 허물어지는 것은 아닐까?  

   

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은 “애비는 종이었다”라며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들추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할머니, 어머니, 외할아버지를 차례로 거론하며 가난하고 험난하게 살아온 족보들을 열거한다.


하지만 이슬이 맺히고 피가 맺힌 삶일지라도, 햇볕이 들 때나 그늘에 있을 때에도, 병든 개처럼 헐떡거리면서도,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고 바보 천치라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물세 해 동안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하였다.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매순간 바람을 맞는 것이다. 휘몰아쳐오는 인생의 바람 속으로 독기를 품고 뛰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걸어가면서 가슴속에 찬란한 희망의 바람들을 키워가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은 산모퉁이 돌아 논에 있는 외딴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외딴 우물처럼 조용히 찾아간 그 우물에 비치는 자기 얼굴은 달과 구름과 하늘이 어우러져 있는 그 좋은 배경을 망치는 주범으로 표현된다.


보기 싫다고 우물에서 돌아서니 또 그 사나이가 불쌍하게 여겨져서 다시 우물을 찾아간다. 그렇게 오도 가도 못하며 미워하다가도 불쌍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그 사나이가 바로 자기라고 고백하고 있다.


나도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서 미워했던가? 나의 집안, 외모, 말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학벌은 또 어떻고. 나 자신을 향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다가 나 자신이 불쌍해서 엉엉 울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래도 내가 나를 껴안아야 한다며 우물가에서 눈물을 훔치며 돌아왔었다.     


사진기와 프린터가 발달하면서 요즘은 좀처럼 자화상을 그리는 작가가 많지 않다. 대신 카메라 앞에 미소를 띠면서 사진을 찍는다. 사진 속의 나는 늘 웃는 얼굴이다. 승리의 브이 표시, 사랑의 하트 표시 그리고 당찬 결기의 주먹을 내밀기도 한다.


하지만 찰칵 소리가 마치면 미소도, 손가락 브이도, 하트도, 결기어린 주먹도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곧바로 화면을 통해 좀 전의 내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나의 자화상을 볼 수는 없다.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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