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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pr 30. 2022

내가 있어야 이 세상이 온전해진다


서양 화가들 사이에서 내려오던 오랜 고민거리가 있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배꼽이 있었을까라는 문제였다.

인물화를 그리기 좋아했던 이들치고 아담과 하와의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던 화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그림은 그리 많지 않다.

서양화가 기독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도 성경의 첫 인물인 아담과 하와의 그림이 별로 없다는 것은 의외이다.

화가들이 못 그린 것이 아니라 안 그린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그림을 그렸다가는 자칫 논란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다는 아담과 하와를 그리려면 당연히 누드화여야 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담과 하와에게 배꼽을 붙이기가 애매했다.

그렇다고 해서 배꼽을 안 그리면 그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래저래 고민이 될 바에는 차라리 안 그리고 말자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배꼽 하나 있고 없고를 가지고 괜한 부산을 떤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배꼽 하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큰소리칠 수는 없다.

배꼽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배꼽이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지구상에 엄마 젖을 먹고사는 포유류들이 많이 있지만 배꼽을 가진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동물들에게도 탯줄이 있는데 세상에 태어나면 탯줄이 끊어지고 말라비틀어져서 흔적이 남지 않는다.

사람처럼 배꼽이라는 흉터가 남지 않는다.

믿기지 않는다면 오늘 당장 반려동물을 뒤집어 놓고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혹시 살아가다가 뭔가 큰일을 저질러서 ‘난 사람도 아니야!’라는 자괴감이 들면 조용히 화장실에 가서 웃통을 열어보면 알 수 있다.

만약 내 배에서 배꼽이 안 보인다면 사람이 아닌 게 맞다.

하지만 배꼽이 보인다면 나는 여전히 사람이다.

잘못이 많은 사람이고 좀 못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배꼽인데 그 모양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아니, 배꼽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그러니까 배꼽의 모양으로 사람을 구별할 수도 있고 찾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에는 손가락 지문만 다른 줄 알았다.

눈의 홍채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다.

이제는 배꼽까지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똑같이 생긴 것은 뭐가 있을까?

없다.

없을 것이다.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는 데칼코마니가 있다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구석을 찾을 수 있다.

비슷하게 보일 뿐이지 실제는 다 다르다.

키도 다르고 몸무게도 다르고 이목구비도 다르고 머리카락의 모양과 색깔도 다르다.

똑같은 것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 다른 것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몸속 오장육부의 생김새도 다르다.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은 생김새도 크기도 무게도 똑같은데 사람은 같은 사람이 없다.




모습이 다른데 마음이라고 같을 리가 없다.

일찍이 김영랑 시인이 “내 마음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를 찾았지만 아마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나처럼 알만한 사람은 없다.

“내 뱃속에서 낳은 자식인데도,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도 그놈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어머니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 이불 덮고 자는 사람이지만 그 속을 알 수 없겠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내 마음과 같겠지’라고 여겼다가는 큰코다친다.

세상에 나와 같은 이가 없듯이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도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보면서 왜 저러냐고 의아해하지 말자.

나와 다른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니다.

내가 보는 시선과 다르고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를 뿐이다.

세상에 나는 하나뿐이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 한 모퉁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있어야 이 세상이 온전해진다.

내가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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