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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y 02. 2022

이 좋은 계절을 만났으니 실컷 누려보자!


나는 5라는 숫자를 참 좋아한다.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받은 나만의 번호가 5번이었다.

키 크기의 순서로 번호를 매기는 학교도 있었지만 내가 나온 학교는 이름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매겼다.

쉰 명 조금 넘는 아이들 중에서 내 이름은 남자아이들 중에서 다섯 번째였다.

한 학년에 한 반으로 구성된 시골의 작은 학교였다.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선배들까지만 하더라도 한 학년에 두 반이었는데 내가 태어날 때부터 본격적인 가족계획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출산율이 떨어졌고 그 결과는 학교에 들어갔을 때 학급 수의 감소로 나타났다.

한 학년에 한 반이었기에 1학년 때 받은 내 번호 5번은 6학년 때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중간에 전학을 오고 가는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내 앞의 네 명은 변동이 없었다.

학년이 바뀌면 아이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한 담임선생님께서는 이름 대신에 우리들의 번호를 부르곤 하셨다.




내가 키도 크고 줄곧 반장을 도맡아 해서 그런지 번호 5가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나를 부르는 소리였고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내 번호가 불리면 기분이 좋았다.

나를 부르는 사람은 곧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하루 동안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을 경험하는 것은 정말 싫다.

내가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없어도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김춘수 선생도 <꽃>이란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불리지 않는 사람은 그저 눈앞에 지나치는 하나의 움직임에 불과할 뿐이다.

누군가 나를 부른다는 것은 그에게 내가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에게 다가온 번호 5번의 영향은 대단했다.

숫자 5만 보면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았고 사람이 많은 곳에 줄을 서더라도 5번이 찍힌 번호표를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가장 좋은 달은 당연히 5월이다.

더군다나 5월은 내가 태어난 달이기도 하고 내 아들이 태어난 달이기도 해서 더욱 친하게 느껴진다.

휴대전화 번호를 정할 때도 5자가 많이 들어간 번호로 정했다.

한때는 은행의 통장 비밀번호에도 5자를 사용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런 번호를 사용할 수가 없다.

나만 이렇게 특정한 숫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삼세판의 숫자 3을 좋아하고 중국인들은 발전하고 발달하는 발(發) 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그런지 숫자 8을 보면 환장을 한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는 하늘의 숫자 3과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땅의 숫자 4를 더하거나 곱한 7과 12를 좋아한다.




여하튼 지금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 5가 지배하는 5월이 되었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따스하며 바람은 기분 좋게 살랑인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도 연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여름의 짙은 녹색도 아닌 딱 이만큼의 색깔이 나는 좋다.

꼭 깨끗한 물에 초록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짙은 색깔로 시작했다가 점차로 넓게 퍼지면서 엷게 채색을 해나가는 모습이 그 자체로서 한 폭의 그림이다.

그 나무들 아래로 봄꽃이 만개를 했고 그 꽃 사이를 벌과 나비가 날아다닌다.

내 고향 제주도의 돌담 울타리 안에서는 청보리가 익어가고 동구 밖 과수원길에는 새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흰 눈처럼 흩날리는 계절이다.

두 팔 뻗어 기지개를 켜고 뻐근했던 근육을 풀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마스크 안에 갇혀 불콰한 입김으로 반질반질해진 얼굴도 봄바람으로 산뜻하게 씻어야겠다.

이 좋은 계절을 만났으니 실컷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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