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되면 늘 고민이 된다.
어느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이다.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살펴보니 내가 이용하는 식당이 10개 정도 되는 것 같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이 10개 정도의 식당을 번갈아가며 들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만 되면 무엇을 먹을지 고민을 한다.
식당을 정하면 그다음에는 메뉴를 정해야 하는데 이것도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
짜장면을 먹고 싶었는데 막상 자리에 앉고 보니 짬뽕이 땡기는 날이 있다.
그렇다고 짜장면이 싫은 것은 아니다.
짜장면도 한두 젓가락 먹고 싶다.
나 같은 결정장애자들을 위해서 짬짜면이라는 메뉴도 나왔는데 그것으로도 뭔가 아쉽다.
밀가루 면만 먹으면 속이 안 좋아질 테니까 밥도 한두 숟갈 먹어야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매일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식당에는 ‘아무거나’라는 메뉴도 있다고 한다.
그것도 인기메뉴라고 한다.
식사 메뉴를 정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선택 상황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머뭇머뭇거리면서 결정하지 못할 때가 은근히 많다.
전화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전화를 할까?
에이 내일 하지 뭐.’ 이러면서 차일피일 시간만 보낼 때가 있다.
해야 할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면 그제서야 낑낑거리며 해대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혹시 내가 결정장애자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결정해야 할 상황이 되면 더 좋아 보이는 쪽으로 결정을 하는 경향이 있다.
사과 두 개를 손에 올려놓고 어느 것을 고를까 살펴보고서는 크고 신선하고 맛있을 것 같은 사과를 택한다.
하지만 매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머릿속에서 ‘좀 더 생각해 봐.
좋은 것도 중요하지만 더 의미 있는 일이 중요할 수도 있어.’라는 말들이 메아리친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우리가 얼마나 결정을 못하는 존재인지 14세기에 살았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장 뷔리당(Jean Buridan)이 꼬집어 말한 게 있다.
배고픈 당나귀는 건초 냄새를 맡으면 그곳으로 달려가고 목마른 당나귀는 물 냄새를 맡으면 또 그곳으로 달려간다.
당나귀가 그렇게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엄청나게 배가 고프면서도 또 목이 말라 헐떡거리는 당나귀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까?
당나귀의 왼쪽으로 몇 발짝 앞에 건초더미를 놓고 오른쪽으로 동일한 거리에는 물통을 놓아두었다면 당나귀는 고민을 할 것이다.
물을 먼저 마실까?
건초를 먼저 먹을까?
굉장히 쉬운 결정일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건초를 먼저 먹자니 목말라죽을 것 같고 물을 먼저 마시자니 배고파 죽을 것 같으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장 뷔리당의 당나귀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은 굶고 목말라죽을 것이다.
장 뷔리당의 당나귀가 14세기에만 있었던 줄 알았는데 오늘날에도 많이 보인다.
생각만 하다가는 죽는다.
장 뷔리당의 당나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것이다.
그러면 엉겁결에 당나귀가 한쪽으로 뛰쳐나가겠고 그러면 물을 마시든 건초를 먹든 할 것이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무엇인가라도 하라는 것이다.
생각만 하지 말고 몸을 움직이라는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 생각 속에 갇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19세기 말에 살았던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죽어서까지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을 써달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도 그동안 충분히 생각했다.
더 생각해봤자 예전에 다 했던 생각들이다.
이제 그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자.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 몸을 움직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