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길처럼 곱슬곱슬해진 머리카락이 좋다

by 박은석


나이가 들면 몸에 힘이 빠진다고 하는데 몸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에도 힘이 빠지는 것 같다.

굵은 털이 기세 좋게 쭉쭉 뻗었었는데 요즘은 머리카락의 굵기도 얇아졌고 그 모양도 곱슬곱슬해졌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은 파마를 했냐고 물어본다.

머리카락이 살짝 구부러지니까 고집도 살짝 꺾이는 것 같다.

사람이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탁구를 치거나 테니스를 치면 상대방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요즘은 이기면 이기는 것이고 지면 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야구를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엘지트윈스가 연패를 하면 모니터를 향해서 구시렁구시렁 잔소리를 퍼부었었는데 요즘은 이번에 진 것은 진 것이고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먹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다.

머리카락만 구부러지는 게 아니라 마음가짐도 구부러지고 있다.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보면서도 마음이 구부러지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곱실거리고 구부러지는 게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핏속에 구불구불한 원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꼬부랑 넘어 다니던 옛날이야기를 즐겨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는 쫙쫙 뻗은 신작로를 좋아했다.

큰길이라고 했고 한길이라고도 부르며 꼬부랑길은 싹 밀어버리고 그 넓은 길에 합류하려고 했다.

빨리 갈 수 있고 많은 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쫙 뻗은 길이 좋은 길인 줄 알았다.

부지런히 그 길들을 걷다 보니 구불구불한 옛길이 그리워진다.

인생이 늘 100미터 달리기하듯이 사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n달리는 사람은 달리라고 하고 걷는 사람은 걸으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n100미터 달리기 선수도 결승선을 지나면 뛰다가 걷던데, 인생도 달리다가 걷고, 걷다가 또 뛰기도 하면서 사는 것 아닌가?n쭉 뻗은 고속도로도 좋은 길이지만 느릿느릿 돌아가는 올레길도 좋은 길이다.




지리산 자락의 구불구불한 길을 많이 걸었는지 전라북도 정읍 출신의 이준관 시인은 <구부러진 길>이라는 시를 썼다.

제목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시를 읊으려고 했는데 시가 한 폭의 한국화로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내가 걸어온 길들이 왜 이렇게 구불구불거리냐며 투덜댔었는데 구부러진 길이 많았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 보폭대로 걸어도 빨리 안 간다며 뒤에서 빵빵대지도 않았고 지치면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 쉬엄쉬엄 쉬어갈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구부러진 길은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길이다.

하늘의 구름이 흘러가는 길도 구불구불하고 땅의 물이 흘러가는 길도 구불구불하다.

굴뚝의 연기가 올라가는 길도 구불구불하고 입으로 먹은 음식이 몸속에서 내려가는 길도 구불구불하다.

갓 태어난 아기도 꼬부랑하고 그 아기를 보고 좋아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꼬부랑하시다.

요즘 들어 내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게 변하는 것은 구불구불한 길을 꼬부랑꼬부랑 걸어가야 하는 내 모습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이 벌써 아시고서 내 머리카락을 그렇게 조금씩 바꾸어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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