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by 박은석


나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박완서 선생의 글을 통해서 배웠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고 나서 한동안 박완서 후유증을 앓았었다.

그분의 책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집어 들었다.

덕분에 1930년대 이후 개성과 서울 지역에 살았던 소시민들의 삶을 어렴풋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책에는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대단한 인물들의 활약상들을 영웅담처럼 싣고 있었다.

하지만 박완서 선생의 글에는 뛰어난 위인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업적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때리면 맞고 몰려오면 도망가면서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인다.

방송에서는 괜찮다고 했는데 대통령까지 나서서 지켜준다고 했는데 아무에게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이런 사실들이 있었음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총상을 입은 오빠를 살리려고 온 식구가 애를 쓰는 모습,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숙녀가 피난길에 먹을 게 없어서 남의 집에 들어가 쌀을 훔치는 장면, 인민군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부역을 나갔던 사람들, 부역 나갔던 시민들을 빨갱이라며 학살했던 사건들.

북한으로 끌려가다가 기적적으로 도망치게 된 사연, 미군들을 끼고 있던 양공주들에게 가서 일감을 얻어오던 올케언니가 양공주라는 누명을 쓰게 된 사연, 자신은 양공주가 아니라며 울부짖는 장면들이 잊히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알콩달콩 살아간 이야기, 나이 마흔에 글을 쓰게 된 사연,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통곡하는 모습도 눈에 선하다.

아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서도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고 있는 당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는 장면도 떠오른다.

이 모든 사연들을 통하여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편안한 시대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나는 이게 맞고 저건 틀리다며 툭하면 법을 들이밀고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내세운다.

하지만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을 한다.

그건 살아남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생존이며 생명이다.

살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살기 위해서 싸움을 한다.

지체 높은 양반 가문일지라도 재난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허드렛일이라도 해야 한다.

손에 흙 한 번 안 묻히고 살았다는 것은 절대로 자랑거리가 아니다.

미국 여류 작가인 마거릿 미첼도 그런 마음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썼다고 했다.

재난과 격변의 시기를 만나더라도 어떤 사람은 쉽게 지나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능력 있고 강하고 용감한데도 쉽게 굴복해버린다.

마가릿 미첼은 의기양양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한 가지 특징을 보았다.

그것은 살아야겠다는 ‘불굴의 의지’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질 수 있다.

아니, 언젠가는 다 사라진다.

푸르른 청춘도 가고, 왁자지껄하던 식구들과 친구들도 하나씩 떠나간다.

넉넉했던 마음과 주변 환경도 물거품처럼 푹 꺼지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스칼렛의 인생이 그랬다.

사랑했던 애슐리도 떠나갔고 남편인 찰스도 떠나갔다.

어머니도 떠나고 아버지도 떠나고 아이도 떠나갔다.

새로운 사람도 떠나갔다.

땅과 집도 사라지고 노비와 말과 마차도 사라졌다.

젊음도 사라지고 꿈도 이상도 사라졌다.

살아온 모든 순간이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몸짓이었던 것 같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칼렛은 굴복하지 않는다.

손을 놓고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안 되면 저것을 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떤 답을 찾는다면 그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001.jpg


keyword